한국은 영화, 음악, 게임 등과 같은 문화상품의 배급망이 잘 갖추어져 있다. 미국에서 개봉되는 영화를 한국에서 같은날 관람할 수 있으며 음반이나 게임 등 신작 타이틀 역시 미국·일본 소비자와 동시에 구매할 수 있다.
문화상품의 소비층 역시 이미 세계적인 취향을 갖고 있다. 할리우드의 최신 영화, 미국 폭스 스포츠의 메이저 야구 경기, 위성 채널의 뮤직 비디오, 블리자드의 최신 게임들을 아무런 거리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디지털 콘텐츠의 배급 네트워크 역시 막강한 수준이다. 유선 초고속인터넷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며 이동전화를 이용한 무선 인터넷망 역시 일본과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잘 발달돼 있다. 방송 분야는 다소 늦었지만 올해말을 기점으로 디지털 위성방송망이 본격적으로 구축된다.
이처럼 물적, 인적 측면에서 발달된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는 한국은 콘텐츠 강국이 됐거나 가까운 미래에 그렇게 될 나라로 낙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한국을 콘텐츠 강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국내에서 발표되는 다양한 보고서도 한국이 콘텐츠 후진국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문화관광부의 ‘문화산업백서’에 따르면 2000년 기준 한국 문화산업 시장 규모는 171억달러로 전세계 1조2087억달러의 1.42%에 불과하다.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이 올해 초 발표한 ‘인터넷콘텐츠 시장 전망’에 따르면 2000년 한국 인터넷콘텐츠 시장 규모는 1조2700억원 규모로 전세계의 1% 수준이다.
추계 예술대학교 문화산업대학원의 김휴종 대학원장은 한국 문화 산업의 세계 시장 점유율, 국제적 인지도, 상품 차별성, 경영적 경쟁 자산, 기술적 경쟁 자산 등 5가지 요소를 놓고 볼 때 2001년 9월 현재 한국의 문화산업은 전세계의 1.4%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고 있다. 표 1 참조
현재 빚어지고 있는 네트워크와 콘텐츠 산업간의 불균형은 한국을 콘텐츠 강국은커녕 전형적인 콘텐츠 수입국으로 추락케 할 개연성이 높다. 한국산 콘텐츠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해 내수 시장을 지키지 못한다면 강력하고 막강한 네트워크는 외국산 콘텐츠들의 유입 경로로 활용돼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온 한국의 문화산업을 초토화할 것이란 우려다. 자칫하면 막대한 자금과 시간을 투자해 막강한 콘텐츠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고 이를 송두리째 외국산 콘텐츠에 내주고 새로운 형태의 문화 식민지로 전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했듯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콘텐츠를 만들어 내면 된다. 물론 당장 콘텐츠 산업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상품을 만들어 낼 수는 없겠지만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한류 열풍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가능성이 높은 분야는 많다. 업계 전문가들은 대중 가요, 방송 프로그램, 온라인 게임, 3D 애니메이션, 영화, 모바일 콘텐츠 등의 분야에서 한국산 콘텐츠 상품의 경쟁력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라는 지적이다.
다행히 정부는 최근들어 인터넷정책이 네트워크와 하드웨어 등 인프라 중심으로 추진돼 콘텐츠 산업이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올 들어 콘텐츠 진흥정책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정보통신부는 디지털콘테츠산업 발전계획을 내놓았고 문화부는 문화콘텐츠 비전 21 계획을 발표했다. 이 두 가지 계획은 모두 콘텐츠 산업을 국가적인 전략 산업으로 집중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과제와 전략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목표와 구호만 있을 뿐 각론이 없다. 한국 콘텐츠산업 육성에 있어 핵심적인 내용인 해외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계획이 빠져 있다.
정보통신부의 목표처럼 2005년까지 디지털콘텐츠 선진 7개국에 진입하거나 문화부의 모토대로 2005년 세계 시장 점유율 5%를 달성하려면 해외 시장 공략이 필수적이다. 2000년 기준 세계 시장의 1% 수준였던 한국 콘텐츠 시장 규모가 5년안에 갑자기 5%선으로 커지려면 내수 시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더욱이 현재 외산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게임을 비롯해 애니메이션, 캐릭터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고 영화, 음악, 방송 등을 아시아 최고 수준으로 키워 세계 문화콘텐츠 7대 강국이 되려면 각 분야별로 해외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실천 계획이 뒤따라야 한다. 각 분야별 시장 상황과 수준 등을 고려한 구체적인 세부 계획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예컨대 콘텐츠산업 분야에서도 국제적인 표준과 기술 개발이 필요한 분야가 있는가 하면 어느 정도 기술력을 갖추고 있어 적극적인 해외 마케팅 지원이 필요한 분야가 있다. 또한 전형적인 스타 마케팅이 뒷바탕돼야 하는 분야도 있다. 그러나 정부의 해외 시장 지원책은 품목을 백화점 식으로 나열해 필요한 기술을 개
발하고 해외 전시회 등에 참여하는데 지원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또한 각 국가별 특성을 감안한 수출 전략도 마련돼야 한다. 예를 들어 한류 열풍이 불고 있는 중국과 동남 아시아의 경우 영상, 방송, 음악과 같은 전통적인 문화 상품의 수출 가능성이 높지만 대만을 제외한 대부분 국가의 경우 아직까지 초고속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지 않아 게임을 비롯한 디지털콘텐츠의 수출은 장기적인 과제로 취급돼야 한다. 반면 미국, 일본, 유럽 등지의 경우 한류 열풍과 같은 문화적인 트렌드를 기반으로 한 시장 공략은 상대적으로 힘들어 보인다. 이 지역 국가의 경우 이미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산업이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마케팅 지원만 바탕이 된다면 국내 업체들의 시장 공략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처럼 구체적인 시장 분석을 바탕으로 한 현실적인 비전과 세부적인 실행 계획이 마련돼야 함에도 최근 정부가 경쟁적으로 발표한 지원책에는 이것이 빠져 있다. 만약 정부가 자체 인력과 힘만으로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민간 기관과 학계 및 업계 전문가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한국 콘텐츠산업의 해외 진출 실행 계획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에 앞서 각 분야별 콘텐츠산업의 해외 진출 현황과 경쟁력 지수를 파악할수 있는 ‘한국 콘텐츠산업 백서’같은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을 먼저 시작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이창희기자 changh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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