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 논설실장 hdlee@etnews.co.kr
전국에서 벌초가 한창이다. 예전에는 벌초를 낫으로 하지 않고 손으로 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산소에 난 풀은 그냥 풀이 아니라 조상의 모발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조상의 모발에 낫을 대는 것은 큰 불효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성하게 자란 산소의 풀을 일일이 손으로 뽑았다.
벌초는 조상의 은덕을 기리면서 후손간 화목을 다지고 모두가 한 뿌리 자손임을 확인하는 동일체 의식의 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태가 많이 변해 손 대신 낫이나 예초기를 이용해 예전보다 쉽고 빨리 벌초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이보다 더 발전한 전문벌초대행업체까지 등장해 호황이다. 인터넷에 개설된 사이트만 해도 상당수다. 개인적인 이유로 벌초를 못가는 사람이 일정금액을 내면 대행업체가 벌초를 해주고 그 과정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정보사회의 한 단면이다. 그런데 벌초와 관련해 ‘처삼촌 뫼 벌초하듯이 한다’는 속담이 있다. 어떤 일을 정성들이지 않고 건성으로 할 때를 비유한 말이다.
요즘 국정감사가 한창이다. 지난 10일부터 전국 402개관을 대상으로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가정이긴 하지만 국정감사를 ‘처삼촌 뫼 벌초하듯이’ 건성건성하면 어떻게 될까.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그런 개연성이 전혀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여야가 특정사안을 놓고 정치공방을 벌이다 시간에 쫓기면 건성으로 감사한 사례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선 피감기관이 가장 좋아할 것이다. 수비해야 하는 피감기관의 입장에서 싫어할 이유가 없다. 잘해야 본전이고 아니면 밑지는 게 감사다. 기간이 짧으면 그만큼 답변이 줄어드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쉴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아쉬운 점이 많을 것이다. 국감이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한껏 높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국감 스타로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도 있다. 게중에는 다음 선거를 의식해 은근슬쩍 지역구 민원을 해결하려는 낯두꺼운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런 기회가 줄어들었으니 좋아할 일은 아니다.
가장 손해보고 억울한 것는 국민이다. 1년간 국정의 공정집행 여부를 꼼꼼히 따져보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그 대안을 제시하길 고대했는데 주마간산격의 국정감사를 한다면 울화가 치밀 일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 올 국정감사는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눈으로 보고, 국민의 입으로 질의하고, 국민의 귀로 듣는다는 자세로 실시해야 한다. 지금 나라 안팎은 위기 상황이다. 우리 경제도 불황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다. 미국은 동시다발적인 테러로 얼굴 없는 적과 전쟁 중이다. 소설이나 영화에 나옴직한 테러가 일어나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경기침체의 진원지인 미국 경제가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 여파가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리 없다. 어제 국내 주식은 대폭락해 거래가 한때 중단됐다. 수출에도 타격이 클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삼촌 뫼 벌초하듯이’식의 국감은 안된다. 따져봐야 할 굵직한 사안만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공적자금은 지금까지 134조원이 투입됐지만 회수율은 25% 수준이다. 회수 불가능한 공적자금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로 인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공적자금이 들어간 금융기관·대기업의 도덕적 해이는 그냥 둘 일인가. 그 돈은 바로 국민의 세금이다.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또 각종 정책 실패로 인한 국민 부담이 가중된 부문은 없는가. 부진한 공기업 구조조정, 노사문제, 부실기업 정리, 기업의 경영 투명성 확보. 여기 저기서 터져나오는 각종 부조리 등에 대한 원인과 대책은 무엇인가. 모든 게 국민의 관심사요, 국민 생활과 직결된 문제다.
정책자료집을 내는 등 성실히 국감에 나서는 국회의원이 늘긴 하지만 문제점에 대한 집요한 추궁이나 핵심을 찌르는 송곳질문이 적은 게 사실이다. 더욱이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국회의원은 드물다. 과다한 자료제출 요구에 속기록용 발언, 중복과 핵심을 벗어난 호통치기식 질의 등 구태가 여전하다. 폭로성 인기 발언과 자신들의 이해가 걸린 정치 공세도 남아 있다.
이제 국회의원들은 자료공유, 중복질의 방지, 정책대안 제시 등으로 국민과 국익을 우선하는 국감을 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 우리가 처한 최악의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다. 지금은 국감장에서 말싸움이나 정쟁의 파도타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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