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렬하던 햇볕이 한층 누그러졌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진 날씨와 푸른 하늘은 굳이 달력을 보지 않아도 풍요의 계절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음을 알린다.
9월 비디오시장은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작품이 주류를 이루며 여름 블록버스터에 물린 마니아들에게 색다른 기대감을 갖게 한다.
우선 ‘파이란’ ‘노랑머리2’ ‘수취인불명’ ‘아미지몽’ 등 대작은 아니지만 수작으로 호평받은 우리 영화가 가장 눈에 띈다.
일본 작가 야시다 지로의 소설 ‘러브레터’를 원작으로 한 ‘파이란’은 송해성 감독을 데뷔작 ‘카라’에 이어 일약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한 화제작.
한국으로 건너온 여인 파이란(장백지)과 그녀의 불법취업을 합법적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위장결혼한 인천의 삼류 건달 이강재(최민식)의 얘기를 다룬다.
사랑의 감정도, 부부로서의 연도 없지만 사랑의 안타까움이 서려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죽음 때문에 묵묵히 접어야 했던 사랑의 쓸쓸함을 담았다면 ‘파이란’은 바로 그 죽음에서 출발하는 사랑의 애잔함을 그린다.
‘수취인불명’은 ‘엽기영화의 선두감독’이라 불리는 김기덕 감독의 작품.
70년대 말 미군기지 주변의 한 농촌마을을 배경으로 양공주였던 어머니와 그의 아들, 그리고 개장수 등 시대에 뒤진 삼류 인생을 배경으로 빚어지는 아픈 상처와 왜곡된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사회적 메시지가 강렬하면서도 서정성이 곁들여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성전환자로 장안의 화제가 된 하리수가 출연한 ‘노랑머리2’는 성전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고발한 작품.
성전환자 J, 스타지망생 Y, 영화화 학생 R는 우연히 만나 범행을 저지르고 달아나면서 서로의 편견을 하나씩 벗겨나간다.
‘성전환자의 벗은 몸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한 작품’으로만 생각한다면 감상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이 괜한 상상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하리수의 연기는 비록 중견배우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의 매력은 여전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여름을 아쉬워하는 것일까.
막바지 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궜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빼놓을 수 없다.
케빈 코스트너가 열연한 ‘D-13’은 냉전이 한창인 지난 60년대 실제 있었던 쿠바 미사일위기를 다룬 작품. 3차대전 발발에 직면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에 백악관의 13일을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히 재현했다.
평화적 해결을 바라는 케네디와 군사공격을 고집하는 강경군부 등 수뇌부의 갈등, 소련과 미국의 막판 비밀거래 등 흥미진진한 뒷얘기들이 펼쳐진다.
산드라 블록이 주연한 ‘미스 에이전트’는 산뜻한 코미디물. 부스스한 머리, 선머슴 같은 팔자걸음, 남성 같은 저돌성을 갖춘 FBI여자 요원 그레이시 하트가 인상적이다.
그녀가 미스USA대회를 폭파하겠다는 연쇄 폭파사건의 범인 색출수사에 나서기 위해 직접 미스USA대회에 참여한다.
‘리치리치’ 등에서 깔끔한 코미디 연출 재능을 보였던 도널드 페트리 감독의 물오른 솜씨를 느낄 수 있다.
외화 가운데도 ‘리멤버 타이탄’과 ‘파인딩 포레스터’ 등 따뜻한 인간미와 정서를 자극하는 작품도 있다.
미국 흑인 미남배우 덴젤 워싱턴이 열연한 ‘리멤버 타이탄’은 일촉즉발의 인종갈등을 불식시키고 99승6패의 신화를 이룬 미국 버지니아주 한 고교 미식축구팀의 실화를 담아냈다.
71년 버지니아교육청이 백인과 흑인학교를 통폐합시키자 새로 생겨난 윌리엄스고교에 흑인 코치가 부임한다. 결국 흑인에 대한 인종편견이 심한 그 곳 학생, 학부모, 시민 사이에 거센 논란이 일어나는데….
‘리멤버 타이탄’은 휴먼드라마와 스포츠드라마의 박진감이 잘 엮여 있어 흥미를 끈다.
이 작품은 시나리오작가이자 감독으로 유명한 보이즈 야퀸이 연출했고 ‘더록’ ‘아마겟돈’으로 널리 알려진 브룩하이머가 제작했다는 점에서 일찌감치 일반의 관심을 끈 작품.
‘미키는 내친구’는 어린이에게 추천할 만한 대표적인 브에나비스타의 애니메이션.
미국 ABC방송에서 매주 토요일에 방영한 미키마우스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미키와 도널드를 비롯해 구피, 플루토, 듀이 등이 출연해 어린이들에게 우정, 모험을 느끼게 하고 감동을 선사해 준다.
‘링’ ‘여우령’ 등 공포영화로 잘 알려진 나카다 히데오 감독의 드라마 데뷔작인 ‘유리의 뇌’는 데스카 오사무의 71년 단편만화를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잠이 든 채로 17년 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유리는 수면상태에서 신체가 성장한다. 이러한 유리와 어릴 때부터 그가 깨어나기를 바라며 기도해왔던 유이치의 사랑이야기가 섬세하게 펼쳐진다.
SF물을 좋아하는 마니아라면 5000만년 전 괴물이야기를 다룬 ‘데블스네이크’와 지구 생명체를 말살시키고 새로운 종을 발전시키려는 이상한 물체의 이야기를 담은 ‘에폭’을 추천할 만하다.
<신영복기자 yb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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