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문 원장(53)은 지난 23일 오전 문화관광부에서 임명장을 받았다. 앞으로 3년 동안 차관급 예우를 받으면서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을 이끌어갈 공직 생활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같은날 오후 서 원장은 그동안 몸담아온 삼성전자에서 퇴임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압구정 빌딩에서 조촐하게 거행된 퇴임식에서 서 원장은 특유의 부산 사투리로 짧막한 퇴임사를 남겼다.
“삼성전자에서 직장인으로서의 커리어를 마치고 싶었는데 중도에 그만두게 돼 섭섭합니다. 문화콘텐츠진흥원으로 자리만 옮겼을 뿐 제가 하고 싶던 디지털 콘텐츠 비즈니스를 계속 할 수 있는 만큼 떠나는 제 마음이 가볍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삼성전자맨으로서 18년간의 직장 생활을 정리하는 자리에서도 서 원장은 떠나는 사람으로서 과거 이야기는 한마디로 잘랐다. 대신 5분여 동안 계속된 퇴임사에서 앞으로 벌일 일에 대한 비전과 고민을 털어놓고 협조와 조언을 구했다. 평소 말을 아끼고 세세한 것보다는 큰 그림을 먼저 생각하고 지난 것보다는 미래의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서 원장의 스타일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이 같은 스타일은 서 원장이 삼성그룹에서 신규사업 프로젝트를 전담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서 원장은 지난 83년 한국과학기술원 선임연구원에서 삼성물산 사업개발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서 원장은 말 그대로 굵직굵직한 신규사업 프로젝트를 만들어냈다. 특히 서 원장은 콘텐츠 비즈니스의 밑그림을 그려내는 일을 해왔다. 예를 들어 홈비디오 제작사 스타맥스 설립(84년), 위성방송 장비개발사 스카이데이타 설립(90년), 영상 프로덕션 스타비전 설립(91년), 케이블TV 캐치원 설립(93년) 등이 지난 94년까지 11년 동안 삼성물산 사업개발실에서 서 원장이 해낸 일들이다. 더욱이 서 원장은 삼성그룹의 콘텐츠 비즈니스를 총괄하던 삼성영상사업단 설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다.
서 원장은 94년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로 옮기면서 콘텐츠산업 분야에서 정보통신 분야로 외도를 하게 된다. 당시 삼성그룹이 PCS서비스사업을 비롯해 정보통신 분야에 집중하면서 신규 사업 기획 분야의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는 서 원장이 이 팀에 참여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였다. 당시 남궁석 삼성데이타시스템 사장과 함께 서 원장은 삼성 정보통신사업의 골격을 만들어냈다. 물론 삼성이 PCS사업권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97년 말까지 삼성전자 정보통신 본부 상무이사로서 통신 분야의 주요 업무를 수행하면서 조직관리 능력과 업무 추진력을 인정받았다.
서 원장은 98년 미디어서비스 부문으로 자리를 옮김으로써 4년여의 외도를 끝냈다. 서 원장은 MP3·웹패드 등을 비롯한 정보기기의 하드웨어와 콘텐츠 부문의 사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 2000년 초에는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의 공급을 전담할 미디어콘텐츠센터장을 맡았다.
“오랜만에 친정격인 콘텐츠 분야로 자리를 옮겼더니 그동안 산업계는 크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시장 규모가 미미하던 게임과 애니메이션 산업이 급부상해 업계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영화·음반·홈비디오 등 아날로그 기반의 콘텐츠보다는 인터넷 기반의 디지털 콘텐츠 산업이 개화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산업 기반이 바뀌었지만 서 원장에게는 모두 익숙한 개념들이었다. 특히 몇년 동안 정보통신 분야의 일을 하면서 쌓아 놓은 노하우와 인맥이 디지털 콘텐츠 비즈니스를 벌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2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에 서 원장은 프로게임단인 ‘칸’을 창단하는 등 게임 분야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제는 연간 1000억원이라는 사업비를 투자해 문화콘텐츠를 육성하는 국가 기관의 장으로서 전혀 다른 일을 해야 한다. 실제로 문화콘텐츠진흥원은 게임·애니메이션·음반·캐릭터·만화 등 문화콘텐츠산업과 관련한 정책 개발, 인력 양성, 우수 콘텐츠 및 응용기술 개발, 마케팅 지원 등의 정책을 펴나가게 된다. 국가전략산업의 육성이라는 큰 과제를 떠맡은 서 원장은 새롭게 각오를 다진다.
“지난 20년간 민간기업에서 콘텐츠산업과 정보통신 분야 일을 해왔습니다. 제 나름대로 그동안 잘해왔다고 생각하지만 문화콘텐츠진흥원의 일은 일반기업의 비즈니스와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주변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매사 신중하게 결정할 것입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콘텐츠산업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서 원장은 디지털 콘텐츠 산업의 육성에 무게를 둘 것이라는 비전을 밝혔다. “문화콘텐츠산업을 육성하는 기관인 만큼 그 형태가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모두 지원육성할 것입니다. 하지만 디지털 방식의 하드웨어와 인터넷이 보편화돼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콘텐츠 역시 디지털이 대세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진흥원사업의 무게중
심이 점차 디지털 콘텐츠 쪽으로 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서 원장은 “진흥원의 고객은 다름아닌 기업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며 기업의 입장에 눈높이를 맞춘 행정서비스를 약속했다. “그동안 실제로 기업을 운영해봤기 때문에 산업 현장에서 국가 기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일반기업 위에 군림하는 권위주위나 책상에서만 생각해 결정하는 탁상행정만큼은 철저히 배격하겠습니다.”
민간기업인으로서 정보통신과 콘테츠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된 서 원장은 당장 정치력에 대한 시험대에 올라 있다. 무엇보다 정보통신부와의 업무중복 문제, 게임종합지원센터와의 역할 분담 등 대내외적으로 쉽게 해결되지 않을 난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이 두 가지 문제는 향후 진흥원의 위상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서 원장의 정치력과 지혜가 요구되는 숙제다. 서 원장은 “나름대로 복안이 있으니 지켜봐 달라”는 주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창희기자 changhlee@etnews.co.kr>
<약력>
△69년 경남고 졸업 △74년 부산대학교 공과대학 졸업 △73∼83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선임연구원 △83∼94년 삼성물산 사업개발실장(이사) △94∼96년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정보통신팀 이사 △96∼97년 삼성전자 정보통신본부 상무이사 △97∼2001년 8월 삼성전자 미디어컨텐츠센타장 전무이사 △98∼99 방송개혁위원회 실행위원회 위원 △98∼2000 위성방송 추진협의회 부회장 △현 한국프로게임단협의회 회장 △현 종합과학기술심의회의 과학기술정보분과 전문위원 △현 하나로통신 비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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