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보드’가 사라졌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어지간한 번화가 치고 불법 해적 테이프를 판매하는 소위 길보드(길거리와 빌보드의 합성어)가 없는 곳은 드물었다. 유명 가수의 신곡이나 흘러간 가요 메들리를 하나의 테이프에 복사, 정품에 비해 10분의 1 가격으로 팔았으니 찾는 사람도 많았고 장사도 잘됐다. 아마도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집이건 차에건 길보드 제품 하나쯤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인지 이무송 같은 가수는 그의 히트곡 ‘사랑이 무엇인지’ 앨범이 100만장 이상 팔렸지만 정품은 2만∼3만장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하소연한다. 즉,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지만 정작 자신에게 돌아온 음반판매 ‘수입’은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마케팅비용은 커녕 저작료나 인세 한푼 안내는 길보드의 기승을 참다 못한 음반관계자들은 자체적으로 단속도 했고 정부에 이들의 처벌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런 탓이었을까. 어느날부터 길보드가 거리에서 사라졌다. 길보드가 자취를 감춘 이유를 정부의 강력한 단속때문으로 해석하는 시각은 다소 순진하다. 정부의 지적재산권보호에 대한 분명한 의지와 불법복제품에 대한 철퇴가 길보드 퇴치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의 예를 보면 정부와 정품업계가 아무리 강력하게 단속하더라도 효과는 그때뿐이었고 길보드는 늘 되돌아왔다.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면서….
길보드 퇴출의 1등 공신은 오히려 IT기술과 인터넷이라 해야 한다. P2P 및 MP3 기술이 급진전되면서 사람들은 굳이 ‘길보드’를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공짜로 원하는 모든 노래를 전송받아 즐길 수 있는데, 굳이 돈주고 음질까지 처지는 복제품을 사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논리의 비약일지 모르지만 음악파일 공유사이트는 그래서 IT와 인터넷으로 무장한 길보드의 업그레이드판이라 할 수 있다. ‘길보드 IT판’ 제1호라 할 수 있는 냅스터가 등장한 이후 한국에도 소리바다가 탄생,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무려 450만명이 넘는 네티즌들이 소리바다를 통해 음악파일을 주고받는다. 지재권에 비상이 걸린 음반업계를 중심으로 인터넷에서 행해지는 불법복제를 중지시켜 달라는 민원이 계속됐고, 급기야 냅스터는 미 법원으로부터 불법판정을 받아 사이트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됐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검찰이 최근 소리바다의 운영자를 기소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물론 소리바다는 냅스터와 다르다. 음악파일 공유가 저작권에 대한 실정법 위반이라면 가장 큰 책임은 파일을 주고받는 네티즌들이다. 400만명이 훨씬 넘는다. 직접적 불법행위자를 제쳐두고 매개자만을 기소하는 것은 어딘가 법 적용의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 또 이같은 일이 소리바다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정보의 바다 인터넷을 일일이 뒤져 저작권 위반행위를 가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소리바다는 운 나쁜 시범케이스에 해당한다.
문제는 길보드가 냅스터나 소리바다로 진보했듯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IT기술은 인터넷에서 새로운 형태의 진일보된 ‘소리바다’를 반드시 만들어낼 것이라는 점이다. 좀더 정교하고 고급기술을 사용한 제3, 제4의 길보드가 예상된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모두 실정법으로 차단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정부·인터넷업계·음반업계 모두 공존의 지혜를 찾아야 한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지재권 적용 범위를 명확히 하고 적정수준의 저작료에 대한 국민적 합의도 뒤따라야 한다. 디지털시대엔 사고도 디지털로 해야 한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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