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크게 바깥쪽 4개산과 안쪽 4개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사산(外四山)은 동쪽 용마산, 남쪽 관악산, 서쪽 덕양산(행주산성), 북쪽 삼각산을 말하고 내사산(內四山)은 북쪽 북악산(백악), 동쪽 낙산, 남쪽 남산(목멱산), 서쪽 인왕산을 일컫는다. 이 내사산을 연결해 도성이 쌓아졌다.
서울을 둘러싼 내사산의 하나이며 풍수로는 북악을 주산으로 한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남산은 높이 262m로 목멱산(木覓山)이라고도 불리웠다. 목멱산이란 옛말의 ‘마뫼’로 곧 남산이란 뜻이다.
목멱산의 정상에는 탑골공원의 정자를 본뜬 팔각정과 서울 타워가 있다. 서울 타워는 1972년 완공된 높이 236.7m의 통신과 방송 종합송신탑으로, 주요 방송사의 방송송신과 통신시설이 설치되어 운용되고 있다. 그 송신탑 아래 부근에 다섯개의 화구가 있는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다. 목멱산 봉화다.
목멱산 봉수대는 조선 태조(1394) 때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설치하여 갑오경장 다음해까지 근 500년간 사용되었는데, 전국의 모든 봉수가 이 봉수대에 도달하게 되는 중앙봉수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나라 봉수제도의 시초는 ‘삼국유사’ 권2 ‘가락국기’에 나타난다.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는 배를 보거든 봉화를 올려주시오.”
기원 후 48년 7월. 수로왕이 부하를 시켜 망산도 앞 바다에 나가게 하여 붉은 빛의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는 배를 발견하면 봉화로서 통보하라는 기록이 최초의 기록으로 나타나는데, 수로왕의 설화 이외에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봉화·봉산성(烽山城) 등의 기록이 보여 삼국시대부터 활용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봉수통신은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신호를 보내 원거리까지 신속하게 정보를 보낼 수 있는 통신방식이다. 정보의 내용을 연기나 횃불로 변환시켜 사전 약정된 신호에 따라 통신을 수행한 후 다시 원래의 정보로 변환시키는 방식으로, 현재의 디지털 통신의 효시로 보는 이도 있으며, 목멱산 봉수대뿐만이 아니라 높은 산의 정상에 설치하였던 전국의 봉수대가 설치되었던 위치가 오늘날 마이크로웨이브 중계소의 위치와 대부분 일치하고 있어 봉수통신을 현대 전기통신의 원천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나라 봉수제도의 확실한 성립은 고려 의종 3년(1149) 8월이다. ‘고려사’ 권81 ‘병지’ 의종 3년 3월조 ‘봉수식정’에는 “서북면병마사 조진약의 상주에 의하여 봉수식을 정하고 평시에 밤에는 불빛, 낮에는 연기를 각 1, 보통 위급시에는 각 2, 3급(정세 긴박)에는 각 3, 4급(정세 초긴급)시에는 각 4번씩 올리도록 규정하고 각 봉수대에는 방정 2인과 백정 20인을 배치하되 그들에게 평전 1결씩을 지급키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각 봉수대에서 정세에 따라 올릴 거화수와 봉수를 지킬 요원의 배치, 그리고 경제적인 배경 등에 대한 규정으로 이때에 이르러 봉수제도 전반에 관한 확실한 체제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4거수 방식은 이후 세종시대의 5거수 방식으로 변천, 우리나라 봉수통신의 정형이 되었으며 시대적 구분의 특징으로 활용된다.
조선의 봉수통신은 고려말에 정비된 봉수제도를 바탕으로, 세종 때에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확립되었다. 세종조 봉수제도의 특징은 봉화거수를 새롭게 정하고, 봉수선로를 일제히 확정했으며, 관계법령도 기존의 법령을 보완하여 보다 자세한 부분까지 규정하는 등 봉수통신을 제도적으로 확립시켰다.
봉수통신의 운영은 수십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간망을 행할 수 있는 산정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전봉에서 거화되지 않거나 비 또는 안개, 구름이 덮여 봉수연락이 불가능할 때는 봉화군이 직접 달려가 보고하였다.
정세와 상황의 완급에 따라 봉수의 거화방식은 구별되는데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4거화 방식보다 단순한 2거 구분법이었던 것이, 세종 4년부터는 5거로 재구분되어 진전된 거화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즉 무사시에는 1거, 해안지방의 경우 왜구가 바다에 나타나면 2거, 해안에 근접하면 3거, 아군의 병선과 접전하면 4거, 왜적이 상륙하였을 경우에는 5거로 하였다. 조선 초 잠시 2거법으로 간소화된 이유는 빈번한 왜구의 침입에 대한 보고를 신속하게 전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봉수제도의 통신시간은 평시엔 하루 한번씩 일정한 시간에 수행되어, 각 봉수에서의 거화 시간과 서울 도착시간이 일정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변방에서 보낸 거화는 12시간 이내에 목멱산 봉수로 전달되었고, 조정의 병조에서는 사람을 배치하여 목멱산 봉수를 간망하면서 무사할 경우에는 그 다음 날 아침에 승정원에 전하여 국왕에게 보고하고, 변란 발생시에는 밤중에라도 곧바로 승정원에 보고하였다.
봉수의 관장은 병조의 무비사가 수행하였으며, 지방의 경우에는 관찰사·병사·수사 등 모든 군사책임자가 그 임무를 맡았고, 관할 구역의 사고시에는 연대책임을 졌다. 또한 정보를 제때에 정확히 보내지 않은 봉수군은 아군이 군대를 미처 대비하지 못하여 성을 빼앗겼을 경우 참수를 당하는 등 엄격한 벌칙이 시행되었다. 특히, 목멱산 봉수는 국민은 물론 국왕도 관심이 지대하여 항상 국왕이 잘 볼 수 있도록 동에서 서쪽으로 화구를 배치하여 설치하였다.
국가의 비상통신망으로 활용되던 봉수통신 제도는 관리와 운용의 어려움으로 더 이상의 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채 16세기 이후 황폐화 되어갔다. 황폐화 되어간 가장 큰 원인은 봉수통신의 구조에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엄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거의 희박한 변란에 대비하여 봉졸(烽卒)이 항시 전방을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고, 일기 불순 등으로 전방의 봉수가 보이지 않을 경우 반드시 이전 봉수까지 쫓아가 중절된 사유를 알아내어 다시 거화해야 하는 등 봉수제도의 근본적인 구조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이후, 봉수통신을 대체하여 ‘파발마’가 주요 통신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봉수통신은 정보를 신속히 전달하는데 국한하여 사용한 것이 아니다. 평상시에
는 정기적인 봉수신호를 올려 나라의 평온과 지방의 안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역할도 수행했다. 그 이유는 봉수 자체가 각 고장의 가장 높은 곳의 전략적 위치에 있어, 그곳까지 법령이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어 현 정치와 왕권이 계속적으로 인정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멱산 봉수대는 1895년 5월까지 사용되었다. 그 이후의 기간 통신망은 전신 전화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모든 통신망을 일본이 강점하고 있던 때로, 봉수통신 제도가 무너짐과 동시에 조선의 운명도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목멱산 꼭대기에서 한줄기로 피어오르는 봉화는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정보였다. 국왕을 비롯한 모든 국민에게 유일한 정보였다. 누구든 바라만 보면 언제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고, 안심하며 열심히 일만하면 되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지럽고 복잡하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차라리 평화롭고 단순하게 피어오르는 목멱산 봉화의 한줄기 연기가 그리운 것은 아닐는지.
이젠 그 불꽃 다시 솟아오르지 않을 목멱산 봉화이지만, 앞으로 영구히 평화
를 알리는 단 한줄기 연기만 피어오르고, 긴급사태를 알리는 두 개 이상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상황이 다시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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