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이젠 기초과학이다..

 ◆윤원창 부국장대우과학기술부장 wcyoon@etnews.co.kr

‘빅 앤 패스트(Big & Fast)’ GM회장이 최근 급변하는 세계 경제환경을 규정한 말이다. 여기서 빅(big)이란 기업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세계와 경쟁하고 1등만이 살아남는 것을 말하며 패스트(fast)는 어제의 첨단기술이 오늘 발전하지 못하면 낙후되는 시대를 표현한 것이다.

 지난 18일 개최된 열린 제8회 국가과학기술위원회 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이를 예로들어 세계 경제상황을 설명하고 과학기술 투자의 선택과 집중을 강조했다고 한다. 김 대통령은 특히 패스트가 4T(IT, BT, NT, ET) 등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우리가 세계 경쟁에서 1등 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판단해 투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과학기술 투자를 꾸준히 늘려왔다. 올해는 정부 예산 가운데 과학기술 예산이 국민총생산(GNP)의 4.4%를 차지할 정도다. 하지만 정부 예산을 고려하면 4T분야에 골고루 투자한다는 것은 어려운 만큼 전략적인 분야를 선택해 집중 투자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좀더 심각히 고려할 게 있다. 바로 우리에게 깊숙이 내재된 ‘빨리빨리’라는 관행이 과학기술투자에 적용되어선 안된다고 본다. 물론 과학기술 예산이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만큼 성과물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단기적인 것만을 고려해선 안된다고 본다. 지금까지 우리 과학기술계를 보면 누구나 기초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기술보다는 당장 돈이 되는 응용기술에 집중 투자해온 게 사실이다. 심지어 연구자들도 값비싼 기초 과학기술 인프라에 대한 관심을 갖기보다 결과가 빨리 나오는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산업계가 매년 25억달러 정도를 선진국에 지불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올 들어 과학기술의 패러다임이 엄청나게 빠르게 바뀌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이에 따라 기초과학과 산업기술의 경계도 급속히 좁혀지고 있는 상황이다. 첨단산업이라 불리는 것들은 모두 기초기술, 즉 원천기술력에 바탕을 두고 창출되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키는 기술개발(demand-pull)위주에서 이제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신생 기술개발(technology-push)위주로 연구개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따라 과거 선진기술을 모방 또는 개량해 향상시킬 수 있었던 기술경쟁력이 이제는 통하지 않고 있다. 현재 기술경쟁력은 오히려 기초기술에 기반을 둔 표준 설정 단계에서 결정될 정도로 기초과학이 중요해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번 국과위 회의에서 전략 투자분야로 선정, 10년 1조4000여억원을 투자하기로 한 나노기술(NT)을 보자. 나노미터(10억분의 1m) 정도로 아주 작은 크기의 소자를 만들고 제어하는 이 기술은 손톱에 붙이는 컴퓨터나 혈관 속을 돌아다니며 치료하는 의료용 로봇 등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초소형 제품 개발이 가능하다. 그러나 나노기술은 현재 이뤄지고 있는 전자소자 소형화 기술과 근본적으로 개념을 달리하는 원자와 분자 수준의 동작 원리를 이용하는 전혀 새로운 기술이다. 때문에 나노기술의 성패는 공학적 제조기술의 발전보다 분자와 원자수준의 새로운 원리를 탐구하는 기초과학에서 획기적이고 실용적인 연구성과를 얼마나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최근 IT와 함께 21세기 첨단기술로 부각돼 투자를 강화하고 있는 생명공학(BT)분야도 DNA 이중나선구조의 발견에서 출발한 것처럼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구분이 애매할 정도로 서로 융합되어 발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은 과학적 원리를 모르고 새로운 기술을 창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최근 선진국들이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개발투자를 높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과기부는 국과위 회의가 열린 다음날인 19일 기초과학 중장기 발전방안 수립을 위한 간담회를 가졌다. 물론 우리나라 기초과학 수준이 세계 60위 수준으로 떨어져 위기감에서 개최돼 때늦은 감은 있지만 상당히 고무적이다. 정부에서 기초과학 육성에 발벗고 나선 만큼 국회의 예산심의과정에서도 이같은 의지가 적극 반영돼야 한다. 여기에 산학연 기관에서도 기초과학분야에 대한 관심이 이뤄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지금의 선진국 과학기술 수준을 보면 그것이 결코 기본기 없이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과학기술 중흥이 공허한 외침이 되지 않도록 기초 인프라를 강화할 수 있는 세심한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새롭고 획기적인 기술개발은 어느 한 순간에 ‘번쩍’하고 이뤄지지 않는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기초 인프라가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기 때문에 기술개발이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