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산업 재조명](3)위기가 곧 기회

 지난 80년대 중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면서 폭발적 성장을 거듭하던 PC산업이 미국경제 불황과 이에 따른 거품 붕괴현상이 동반하면서 된서리를 맞았다. 전세계적으로 난립하던 PC업체들은 공급과잉과 엄청난 재고부담으로 시장에서 하나둘 퇴출되는 비운을 겪었다. IT산업의 총아 PC산업 종말론까지 대두됐다.

 그러나 바로 그 당시 시스코시스템스가 탄생했고 마이크로소프트와 오라클이 증시에 상장됐다. 시스코는 PC의 거품이 스탠드얼론 개념의 소멸일 뿐 산업 자체의 몰락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전세계 모든 PC가 서로 연결돼 상상할 수 없는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했다. 네트워크가 기반이 된 새로운 조류를 예감했고 이는 적중했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면서 네트워크 장비 및 이와 관련된 각종 소프트웨어가 신시장을 창출해 냈다. 그 이후 사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시스코,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은 기업가치 1위를 두고 각축하는 3강이 됐다.

 80년대의 교훈은 두 가지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평범한 명제를 재확인시켜준 것이 첫째요, 특정 산업이나 시장이 일시적 어려움을 겪는다해도 그것이 시대적 대세에 부합된다면 반드시 새로운 돌파구가 열린다는 것이 두 번째다.

 올 들어 몰아치고 있는 미국발(發), 정확히 표현하면 나스닥발 IT산업 위기론도 따지고 보면 80년대 ‘PC붕괴론’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물론 당시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고 IT불황이 예상 외로 장기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지만 시대적 패러다임이 IT인 이상 무언가 새로운 비전이 나올 것이라는데는 이론이 거의 없다.

 사실 최근의 IT경기 침체는 그간의 과속질주에 따른 일시적 숨고르기 성격이 강하고 재정적 요인까지 가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IT패러다임을 창출하고 앞장서 이끌어온 미국의 경우 인터넷을 통한 정보혁명으로 정부는 물론 민간과 기업의 IT수요를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더구나 네트워크 개념을 전면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통신분야의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개방조치를 단행했다.

 이런 조류는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고 전통적인 독점 분야였던 통신 기간망이 경쟁체제로 변화됐다. 자연히 신규 진입을 추진하는 업체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설비투자에 나섰고 이와 관련한 장비 소프트웨어 시장은 가히 폭발적인 신장세를 기록했다. 틈새시장을 겨냥한 중견기업들의 진출도 잇따랐으며 IT산업은 끝을 모르는 호황국면에 진입하게 됐다.

 세계적으로 통신사업자들은 지난 96년부터 99년까지 2배 이상의 설비투자를 감행했다. 매출증가율보다 훨씬 큰 투자를 지속한 것이다. 이 기간동안 미국의 통신사업자들은 3500억달러를 쏟아 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시장의 분위기였다. 투자자들은 대규모 설비투자가 선행돼야 하고 자본 회수기간이 5∼10년이 걸리는 통신분야의 특성을 이해했고 기다려 주었다. 이같은 분위기는 닷컴기업에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무차별 투자와 난립경쟁은 사업자들의 수익성 악화를 불러왔고 매출을 의식하지 않은 과잉투자는 재무구조 건전성에 빨간등을 켰다. 특히 인터넷과 통신망 개방을 통해 자금을 빛의 속도로 유통시키는 것이 일반화된 투자자들은 더이상 장시간의 회수기간을 기다려 주지 못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격화된 시장경쟁 속에서 요금인하와 단가하락으로 버티던 사업자들이 그간의 과다한 투자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확장일로의 시장만 바라본 채 생산량을 늘리는 데 급급했던 하드웨어업체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사업자가 투자를 줄이니 연관업체들은 재고가 쌓일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이런 사례로 시스코를 꼽는다.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한때 수요를 못맞춰 쩔쩔매던 시스코가 생산량을 급격히 늘리자마자 사업자 경기가 후퇴, 매출 격감과 재고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정은 민간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정보화 혁명으로 기업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PC를 비롯, 각종 IT투자에 열중했다. 기업은 다른 모든 투자에 앞서 정보화 투자에 집중했고 투자폭도 해마다 늘려 나갔다. 그렇지만 이들도 전반적 경기 위축으로 투자를 줄인 채 관망 자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다. 이 시장을 타깃으로 했던 수많은 IT기업들이 덩달아 유탄에 맞았다.

 다시 들여다 보자. 지난 90년대 IT붐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다양한 시장을 만들어 냈다. 네트워크 장비산업이 황태자 자리를 차지했고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관련 솔루션업체들은 날개를 달았다. 정부와 기업의 정보화를 촉진할 수 있는 솔루션도 속속 선보였고 시장도 성장했다.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닷컴기업이 탄생했다.

 비즈니스의 지평은 자연히 넓어졌다. 음성통화에서 데이터통신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 새로운 비즈니스가 생겨났다. 모바일 혁명이 일어나면서 m비즈니스가 각광받고 콘텐츠가 떴다. 닷컴기업의 수많은 비즈니스 모델이 시장에서 검증받았다.

 이 기간동안 한국의 IT산업은 가장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산업사회 태동 이후 국내기업들이 시대적 조류에 적시 편승한 것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국내 산업구조가 IT중심으로 완전 재편됐고 반도체·LCD·이동전화단말기·광저장장치 등은 명실공히 세계 1등 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실제로 한국의 전체 무역수지 흑자폭보다 IT분야 흑자액이 훨씬 많다. 국가 경제의 IT의존도는 고용을 포함할 경우 40%가 넘는다는 보고까지 나왔다.

 물론 지금은 조정기라고 할 수 있다. 경제이론가뿐만 아니라 IT업계 CEO들까지도 동의한다. 경제분석가들은 현 IT경기가 이르면 올 하반기, 늦어도 2002년 하반기에는 다시 상승커브를 그릴 것으로 본다. 업계는 재도약을 위해 지금 몸집을 줄이고 체제를 정비하고 있다. 인력을 감축하고 비즈니스 모델도 재점검한다.

 국내 IT산업과 업계가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점은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초일류 IT기업들은 살인적인 감원 한파를 몰고가지만 연구개발 인력은 오히려 확충하고 있고 연구비도 대폭 늘렸다. 인텔이나 모토로라, 시스코의 발표다. 이들은 위기를 기회로 반전하기 위해 ‘노림수’를 감추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IT산업도 준비해야 한다. PC가 쇠퇴하는 것 같았지만 네트워크를 통해 다시 부상했고 모바일 시장이라는 전혀 생소한 분야가 IT활황을 이끌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러한 조류의 변화가 계속될 것이고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시장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그것을 찾아내려고 몸무림치고 경영력을 모아야 할 때다.

 IT가 뒷걸음 치면 한국 경제는 가라앉는다.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한단계 도약에 필요한 새로운 제품과 기술을 개발하고 기존의 경쟁력을 더욱 다져야 할 시점이다. IT로 세계 1등 상품을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그 대상을 더욱 확대할 수 있다. 한국경제의 견인차인 IT는 이미 그만한 위상과 비중을 갖고 있다. 움츠리지 말고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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