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검 특수1부는 지난달 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책임연구원인 A박사를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의 정부기관 연구비 등을 유용한 혐의로 전격 구속했다. A박사는 에너지관리공단이 KIST와 맺은 ‘에너지절약기술시범적용사업 협약’과 관련해 10억원 규모의 연구과제를 따낸 후 이 중 5억4000만원을 빼내 자신이 만든 벤처기업인 에어로케스트인터내셔널에 쏟아부었는가 하면, 한국전력과 공동으로 연구과제를 수행하면서 자신이 매칭펀드로 부담해야 하는 연구비를 내놓지 않고 자신의 회사에 투자했다는 것이 검찰의 발표다.
A박사가 연구중인 과제는 에너지관리공단이나 KIST 자체평가에서도 우수연구과제로 평가될 정도로 유망한 과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발표대로라면 정부기관이 연구하라고 준 연구비를 엉뚱한 곳에 썼다는 것에서 극도로 절제해야 할 과학기술자들이 도덕적 해이에 빠지고 있다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과학기술계의 중론이다.
젊은 소장파 과학기술계 인사들은 KIST의 사례가 ‘연구비는 타먹는 사람이 임자’라는 인식이 팽배한 과학기술계 현상에 비춰볼 때 출연연이나 대학 등 연구주체들이 보여주고 있는 현상 중 빙산의 일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가가 투입하고 있는 연구비가 엉뚱한 곳으로 새고 있다는 것은 과학기술계에 조금이라도 관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것.
이 사건은 특정 연구원의 도덕적 해이를 탓하기 전에 현재 우리사회의 오피니언리더들이라 할 수 있는 박사급 연구원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특히 벤처바람이 불어닥치면서 벤처창업을 하지 못하는 연구원들은 마치 실력없는 연구원으로 취급받는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연구원들 사이에 나타나는 이른바 벤처창업 신드롬 현상과 ‘돈맛 들인’ 연구원들이 빚어낸 도덕적 해이 현상이라는 것이 과기계의 분석이다. 제도적으로는 연구비 관리에 완벽하다고 하지만 연구비를 쓰는 주체들인 연구원들이 도덕적으로 해이해진 마당에 연구비가 제대로 쓰일 리 없다는 지적이다.
과기부가 지난 97년 미래기술로 인간의 뇌를 닮은 컴퓨터를 만들고 뇌질환 등을 치료할 수 있는 신약개발을 목표로 의욕적으로 시작한 이른바 ‘뇌연구개발계획(Braintech 21)’. 최근 정보통신(IT)기술과 생명공학(BT)기술이 뒷받침되어야 연구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국가연구 프로젝트다. 뇌과학과 뇌의학 분야로 나눠 각각 연구를 시작한 이 프로젝트가 최근들어 연구팀들간의 이견으로 흔들리고 있다.
뇌과학연구개발사업단을 주관하고 있는 곳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뇌과학연구센터. KAIST 뇌과학연구센터와 KIST, 생명연 등 3개 연구기관과 서울대·연세대·포항공대 등 11개 대학에서 총 446명의 연구인력이 참여한 이곳에는 정부가 매년 50억여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연구사업은 크게 학제적 연구과제, 기반기술 연구과제, 자유공모과제, 바이오테크 2000 편입과제 등 4개 과제. 그러나 기반기술 연구과제 6개 가운데 △신경세포의 분자세포생물학적 연구 △감각-운동연계의 시스템 신경과학연구 등 2개 과제를 놓고 대학교수 등 생물분야와 의학분야 전문가들이 나서 표면적으로는 연구내용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 분야의 독립을 과기부에 요구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소위 생명·의약분야 등은 기초과학자들의 몫이지 응용과학을 하는 공대 출신들과 같이 연구를 진행할 수 없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 이미 미국이나 일본, 독일 등에서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는 IT·BT기술 융합화 추세와는 동떨어진 주장이다.
앞선 사례가 한 연구원들의 도덕적 해이라면 이 사례는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 고질적인 집단적인 이기주의와 도덕적 해이 현상이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하는 연구가 거시적으로 국가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사명감보다는 국가연구사업을 자신의 연구논문 발표 수단쯤으로 생각하는 과학기술자들이 많을수록 국가연구사업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이 될 수밖에 없다.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는 일부 과학기술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국가 장래를 망칠 수 있다는 점을 깊게 생각해야 할 때다.
원로 과학자인 S박사는 “국가 연구개발목표를 각 연구주체들에게 부여하지 않은 정부의 책임도 크다”며 “하루빨리 정부가 국가연구개발목표를 정하고 국가연구개발사업을 추진하는 연구주체들도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연구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창훈기자 chj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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