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경영>글로벌 파일(3)경제 논리에 무릎 꿇은 미-중 샅바싸움

미국과 중국, 두 대국의 한판 싸움의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이 하이난 섬에 억류되어 있는 미 해군 정찰기 24명의 승무원들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풀어준 것이다. 미·중의 외교전이 아직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얽힐 대로 얽혀 있는 양국 관계로 봐서 미 정찰기 사건은 큰 무리 없이 일단락되고 있다.

두 거물의 기세 싸움은 사고 직후부터 볼만했다. 함부로 움직이고 않았고, 입이 무거웠으며, 버티는 뒷심이 난형난제였다. 게다가 서로 상대를 읽고 있었고, 자신을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이나 중국이나 서로 체면을 살렸고, 딱히 어느 한편에게 패자의 굴레를 씌우기가 애매해졌다.

4월 1일 아침, 사고 발생 직후 미국은 침묵을 지켰다. 중국에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시간을 주려는 의도였다. 부시 행정부는 또 억류된 승무원들을 과거처럼 볼모나 인질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신중한 태도였다.

미국이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은 이뿐이 아니다. 부시 대통령은 외교안보 보좌진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서로 다른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재갈을 물린 것이다. 공식 발언은 부시 대통령 자신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 두 사람만 할 수 있도록 했다. 예전 같으면 벌써 한마디를 거들었을 의회 공화당의 강경파 의원들도 입을 다물었다. 부시 대통령의 말을 들어준 것이다.

중국도 차분했다. 장쩌민 국가 주석이 미국에 사과를 요구함으로써 중국이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됐으나 중국으로서는 다른 선택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미 외교관들이 억류된 미 승무원들과 즉각 접촉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자국 내에서 외국인이 관련된 사건이라면 중국 특유의 느림보 걸음을 보이는 과거 관행에 비춰볼 때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과 중국은 어차피 한번은 맞부닥칠 길을 가고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 정찰기 사태는 예기치 못했던 시기에 일찍 터져나왔다. 부시 행정부의 대아시아 정책의 밑그림은 아직 그려지지도 않은 상태다. 아무리 빨라도 올 가을 부시 대통령의 아시아 방문 이후나 돼야 윤곽이 잡힐 일이었다.

미국과 중국이 대치보다는 협상, 대결보다는 외교에 의한 해결책 모색을 선호하는 배경에는 양국의 경제 이익이 무엇보다도 큰 몫을 차지한다.

중국이 지난해 미국과의 교역에서 얻은 흑자는 무려 750억달러에 달한다. 더구나 중국은 WTO 가입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도 미 기업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경제 개방을 통한 외국 자본 유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국이 이 우선순위를 뒷전으로 미뤄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 미국은 홍콩에 이어 중국의 두번째 수출국으로 전체 수출량의 21%를 대미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수입 역시 일본에 이어 미국이 12%를 차지한다. 이 수입량은 타이완의 12%에 앞서는 것이다.

양국의 경제 현안은 중국의 군사 대국화를 경계하는 목소리나 타이완 문제 등 미·중 양국의 외교 신경전보다 한발 앞서간다. 중국 첸치천 부총리의 미국 방문을 성공적이라 평가했던 것도 양국의 경제이익이 군사나 외교문제를 눌렀다는 뜻이다.

미국과 중국 기업의 경제 교류는 양국 외교 대립의 와중인 4월 11일에도 굵직한 선을 하나 그었다. 미 승무원 송환 소식에 가려 빛이 다소 바래긴 했지만, 포드자동차가 중국 창간자동차 회사에 4900만달러의 합작투자를 발표한 것이다. 포드는 처음으로 중국의 승용차 생산 플랜트에 진출함으로써 수십억 달러를 퍼부으면서 중국 자동차 시장을 넘보고 있는 제너럴모터스와 도요타 등과 함께 중국에 또 하나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포드와 합작한 중국의 창간자동차는 중국 내 3위의 자동차회사며, 포드는 장시성에서 이미 경트럭 조립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충칭의 창간 플랜트에서는 앞으로 연간 5만대의 승용차를 생산하게 된다.

장쩌민 주석은 정찰기 사건이 터져나와 있던 때에 예정대로 라틴아메리카에 가 있었다. 12일 동안 브라질·우루과이·칠레·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 등 6개국을 돌아다니는 세일즈 외교였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중국의 교역을 확대하고, 중국의 WTO 가입 지지를 얻기 위한 나들이였다. 장쩌민 주석의 수행원에는 군부 인사가 없다. 모두 경제관료들뿐이다.

중국은 장쩌민 주석의 이번 라틴아메리카 순방 기간에 교역 및 투자, 교육 분야에서 모두 20개에 달하는 협정을 맺게 된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중국의 경제공략에 힘이 실리기 시작하는 셈이다. 중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양자 교역은 지난해에 무려 52.5%나 증가했다. 교역량만 해도 120억6000만달러 어치였다. 중국 전체 교역량의 3%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이 추세대로 교역량이 늘어날 경우 라틴아메리카의 중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중국이 특히 겨냥하는 나라는 브라질이다. 라틴아메리카 가운데 가장 먼저 중국을 승인한 나라가 브라질이다. 지난해 양국 교역량은 20억달러. 칠레도 중국에 우호적이다. 99년 중국의 WTO 가입을 위한 양자 협정을 가장 먼저 체결한 나라다.

장쩌민 주석은 향후 미·중 관계의 시금석이 될 만한 정찰기 사건이 불거졌어도 예정대로 라틴아메리카로 날아갔다. 경제가 우선인 것이다. 중국의 대미 관계 역시 경제가 앞자리를 차지한다. 정찰기 사건은 해군 정찰기가 하이난 섬에 비상 착륙했을 때 이미 그 끝이 보였다. 11일간의 샅바 싸움은 결국 경제이익이라는 링 속에서 치러진 두 대국의 기 싸움이었던 셈이다. 양국 모두 링 밖으로 나가길 바라지는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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