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취재기- IT가 희망이었네!>6회-북쪽의 사람들

평양 체류중 북측에 대한 시각을 바꿔놓은 것은 평양정보쎈터(PIC)나 김일성종합대 정보쎈터의 컴퓨터시설뿐만이 아니었다. 정보기술(IT) 교류의 주체가 될 북측 사람들 역시 남측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었다. 그런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이가 PIC의 최주식 총사장(54)이었다.

처음 그는 부실한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고 「로력영웅」의 칭호를 받게 된 것은 순전히 『공화국과 수령님의 배려』 덕분이었다고 말해 일행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는 해낼 수 있다』라든가 『우리는 겁이 없다, 못하는 게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하드웨어 장비가 부족해서 모든 것을 소프트웨어로 해결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뜻이었지만 흔해빠진 정치선전구호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에 대한 첫인상은 자존심이 매우 강한 전형적인 북측사람 정도였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그는 달라 보였다. 첫인상과 달리 그는 소신이 분명하면서도 기업가다운 유연함과 예술가다운 열정을 함께 갖고 있었다. 협상 때 남측 대표단 가운데 한사람이 『남쪽 기업가들은 손해 볼 일은 처음부터 안한다』며 이번 협상의 속성을 암시하자, 그는 『나도 기업가다』며 재치있게 받아넘겼다. 『합의를 할 것이라면 시간 끌지 말고 화끈하게 끝내자』고 했을 때도 『나 역시 최가라서 성격이 급하다』며 오히려 맞장구를 쳤다. 그는 『합의만 되면 남

쪽 언론이 어떻게 써도 괜찮다』고까지 했다.

그의 IT론에는 신념이 담겨져 있었다. 평양건설대학 건축학부를 졸업하고 현장감독으로 일하던 그가 컴퓨터에 빠진 것은 85년 38세 때. 컴퓨터 설계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일본의 컴퓨터 전문지 「니케이컴퓨터」를 구독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IT가 국가 장래를 좌우할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 확신을 PIC 설립계획서로 만들어 당과 정무원 등 요로를 찾아다녔다. 그의 계획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인 곳은 평양시 인민위원회였고 PIC는 마침내 86년 7월 15일 7명의 연구원으로 개원할 수 있었다. 현재의 PIC 건물도 그가 직접 설계했다.

그는 『IT야말로 유무형의 새로움을 창조하는 건축을 뛰어넘는 진짜 종합예술』이라고 했다. 오늘도 그는 젊은 후배들에게 『각 기술자는 (책의) 한쪽(페이지)만 되라』는 당부를 잊지 않고 있다. 한쪽 한쪽이 모여 한권의 책(종합예술)이 된다는 평범하고도 명쾌한 논리다. 한마디로 그는 이제까지 예상해왔던 북쪽 사

람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바꿔 놓았을 만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

북측 사람들을 새롭게 보게 한 또 한사람의 인물이 바로 김일성종합대학 정보쎈터 정우환 소장(45)이다. 정 소장 역시 애당초 컴퓨터를 전공하지 않은 재일교포 수학자 출신이었는데, 김일성대의 IT 관련학부와 학생규모를 묻자, 그는 『대학에 컴퓨터 관련학과를 늘리는 것이 IT를 확대발전시키는 방안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수학과 물리와 같은 기초과학을 비롯해 문학과 예술이 중시되면 IT는 자연스럽게 발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9개 연구실로 구성된 김일성대 정보쎈터는 그의 지론에 따라 관련학부와의 연계연구가 매우 중시되고 있다. 이곳에서 개발된 「조선동식물편람」은 생물학부와, 「고문전자편람」은 국어학부와 각각 공동연구를 통해 완성됐다. 3차원(3D) 그래픽에 한해서는 최고의 실력을 갖춰다는 이곳 3D팀 역시 미술학부와 긴밀한 연계를 통해 「타이타닉」을 능가하는 대작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한편 100명의 연구원들이 재직하고 있는 김일성종합대학 정보쎈터는 학교측이 97년 정 소장의 뜻을 받아들여 설립된 곳이다. 장비는 PIC와 대동소이했지만 PC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배려하여주신 선물」이라는 문구가 부착돼 있었다.

정우환 소장의 뜻대로 이 정보센터는 캠퍼스내 수십동의 건물을 광케이블로 연결하는, 김일성종합대의 심장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서버실에는 유닉스 기반의 선 울트라스파크 서버와 윈도NT 기반의 디지털 알파서버가 다수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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