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디지털방송수신기 규격 논쟁

당국이 한국형이라는 명목으로 새로운 디지털방송위성수신기(SVR) 기술표준을 제정하려는 계획에 대해 업계가 현재의 세계규격 DVB를 그대로 따르자며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고 한다. 오는 10월로 다가온 촉박한 방송개시 일정과 함께 갈수록 냉혹해지고 있는 기술시장의 흐름을 감안할 때 업계의 이같은 입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위성방송은 디지털TV 등 각종 하드웨어를 비롯해 영상콘텐츠 등 유관분야 산업효과가 매우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유럽과 일본 등 주요국가들도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본방송을 실시하거나 준비중이어서 안팎의 관심은 그 어느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위성방송시스템의 핵심장비 가운데 하나인 SVR시장의 경우 오는 2005년 내수만 1조3000억원에 이르는 거대규모라고 한다. 더욱이 수출량은 전적으로 해외시장에 의존하는 우리 업계 현실을 감안할 때 최소한 이보다 몇배는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동안 케이블TV용 수신기(세트톱박스) 공급에 의존해온 업계가 몇년전부터 해외시장 개척에 적극 나선 것도 이같은 특수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성전자·LG전자·휴맥스 등 관련업계는 지난해부터 영국·미국·스페인 등 주요 국가에서 채택되고 있는 DVB규격제품을 개발해 전량을 미국과 유럽지역에 수출해 오고 있다. 따라서 정통부와 KDB가 추진하는 한국형 기술규격이 채택된다면 수출비중이 높은 업계에 오히려 부담만 가중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DVB규격은 관계당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여러가지 단점이 있다. 때문에 이를 보완해 우리 환경에 적합한 한국형을 새로 제정한다면 나름대로의 명분도 있고 실리를 챙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 기술시장이 갈수록 선발업체의 힘과 냉엄한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과 취지를 갖고 새로운 규격을 제정한다 하더라도 국제무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결국은 미아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한국형 기술표준 제정방침은 방송개시 일정과 연관해 볼 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라고 한다. 일정상에는 오는 4월 중 방송에 대한 기술표준이 발표되고 7월까지는 SVR의 일반가정으로의 보급이 이뤄지도록 하고 있다. 새 규격이 제정될 경우 업계로는 개발일정이 촉박해져 졸속제품이 난무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디지털위성방송에 대한 신뢰성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70∼80년대 산업시대에 정부주도로 여러 분야에서 한국형이라는 명목으로 각종 규격을 제정하고 제품을 만들어온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형이 단기적 시장진입효과는 거뒀을지 모르나 세계시장의 흐름과는 무관한 것들이 많아 결과적으로 살아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내수와 수출 시장을 함께 감안해야 하는 업계 입장에서 보면 새 규격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기존 규격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보다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음직하다. 따라서 정통부와 디지털위성방송사업자인 KDB 등 관계당국 역시 이같은 입장을 적극 수용해 우리 업계가 명분과 실리를 다 함께 취할 수 있는 방안을 조속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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