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어려워지면 전자상가에도 금방 불황의 그늘이 드리운다. 매출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호객행위나 찍기 등 전자상가의 고질적인 관습이 기승을 부리곤 한다.
그 가운데서도 경기가 나빠질 때면 단골처럼 등장하는 「잠적」은 소비자 한사람만이 아니라 여러 상인에게 연쇄적으로 피해를 입힌다는 점에서 반드시 청산해야 할 악습으로 지적되고 있다.
상인들은 이를 「잠수」라는 은어로 표현하고 있지만 단순히 잠적이 아니라 도주다.
상가 경기가 불황으로 치닫던 지난해 하반기에는 유독 이러한 잠적 또는 야반도주가 많았다. 잠적의 유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환금성이 좋은 상품을 외상으로 거래한 뒤 현금화해 잠적하는 것과 매장 직원이 수금한 돈을 갖고 도주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상품을 현금화해 잠적하는 이들은 대부분 무명·소형업체보다는 상가에 웬만큼 알려져 있게 마련이다. 신용을 쌓기 위해 결제도 정확히 하고 일도 성실하게 하기 때문. 이들은 신용 거래 규모가 커지면 주로 CPU와 메모리·하드디스크드라이브 등 1∼2일 안에 처분할 수 있는 상품을 대량으로 외상 매입한 뒤 주변 전자상가 또는 지방 전자상가 딜러들에게 시세보다 약간 낮은 가격에 판매함으로써 현금을 확보해 잠적한다. 이쯤 되면 매장 보증금이나 재고상품은 횡령 액수에 비해 「새발의 피」가 되기 십상이다.
평소에 비해 턱없이 많은 물량을 외상으로 주문할 경우 일단 주시의 대상이 되므로 이들 업체는 대부분 여러 업체들로부터 물건을 사들인다. 일례로 지난해 10월경 HDD유통업체인 H사 대표는 여러 유통업체들로부터 HDD를 집중 매입, 총 15억여원을 현금화한 뒤 잠적했다. 이 때 이 업체에 물건을 공급한 업체는 1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업체마다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의 피해를 입었다.
사장의 관리부실이든, 직원의 악의든 직원이 수금한 돈을 갖고 도주하는 사건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전자에 비해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현금 수천만원」은 유통업체에 종종 치명타를 안겨주기도 한다.
일부 상인들의 잠적 및 도주는 한 상가 안에서 영업을 하며 매일 얼굴을 마주보는 상인들을 서로 불신하게 만든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올해엔 전자상가도 신용사회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박영하기자 yhpark@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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