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과리(문학평론가, 연세대 국문과 교수)
디지털은 21세기 문명의 불씨이다. 그것의 발명은 최초의 인류가 벼락에서 불을 발견한 사건에 비견할 만하다. 사람살이의 근본이 뒤집혀지고, 거대하고 맹렬한 진보가 어안이 벙벙해진 인류를 휘몰고 갈 것이다.
옛날의 불은 뜨거웠다. 그것이 지나치면 삶의 터전이 다 망가졌으니, 그 불 안에 축복과 재앙이 동시에 도사리고 있었다.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은 바로 축복의 선물을 재앙의 괴물로 둔갑시키기 일수인 인간의 욕망에 대한 엄숙한 경고였다. 오늘의 불은, 한데, 썩 차갑다. 디지털 문명은 산업 문명을 전복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대한 것으로 흔히 여겨져 왔다. 산업 문명이든 디지털 문명이든 모두 기술 진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디지털 문명이 꽃핀 곳은 가상현실의 세계지 실제현실의 세계가 아니다. 노는 장소가 다르기 때문에 디지털은 자연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퍼지게 되었다. 컴퓨터에 푹 빠진다 해서 델 일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잘 알다시피 가상현실은 가짜가 아니다. 가상현실이 이토록 팽창한 것은 그것이 정말 무서운 실제 효과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차가운 불이 현실 속으로 스며들어 우리의 삶을 풍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디지털 문명은 인간을 익명의 단자들로 거듭 쪼개면서, 그 역시 무수히 쪼개진 바깥의 존재들과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접속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여전히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개성과 독립의 인간임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완강한 고집 속에서 디지털 문명 특유의 폭력이 횡행한다. 익명 속에 숨은 온갖 협잡과 공격들, 한결같은 규격을 개성이라고 속삭이는 휘황한 상업적 유혹들. 오늘의 인간은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대형(big brother)에게 목이 매여서, 그 투명 대형을 흉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소형(小兄)들이고, 실제로는 소아(小兒)들이다.
인간-소아들이여, 그러나 억울해 할 게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축복이다. 쪼개진 존재는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에 또한, 만나고 교류하고 협력하는 존재들이다. 오래되었으나 좀처럼 실천되기 어려웠던 덕성을 디지털 문명의 존재론이 마침내 요구한다. 대문자 인간임을 포기하라고. 소문자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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