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15년 아침 7시.
가정주부 P씨는 고선명 위성TV 방송에서 나오는 쇼팽의 왈츠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어 몇 번 뒤척이다 겨우 일어났다.
한달 전 구입한 벽걸이형 TV는 화질이 그만이다. 사람의 땀구멍, 솜털까지 보일 정도로 해상도가 뛰어나다. TV를 구입한 이후 굳이 영화관에 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영화마니아인 P씨는 남편을 졸라 비싼 가격에 TV를 구입했다. 초고속인터넷과 위성TV, 디지털TV는 100Mbps급 전송속도로 날아오는 VOD 동영상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현실보다 더 실감나게 재현했다.
가상공간에서 게임까지 가능한 인텔리전트 TV였지만 사람을 찌르고 죽이는 잔인한 내용들이 많아 게임보다는 영화가 체질에 맞았다. 아이들은 TV를 이용해 도서관의 자료찾기, 게임 등에 열중했지만 아무래도 세대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다.
사실 P씨는 어젯밤에도 잠자리를 재촉하는 남편을 뿌리치고 온라인으로 개봉관에서 상영하는 최신작 영화 몇 편을 보다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쇼팽의 왈츠는 사람의 생체리듬에 맞는 3D 입체음향을 적절하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음악이 잦아들면서 상냥한 목소리의 캐릭터가 나타나 P씨와 가족들의 하루 일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얼마전 인터넷에 들어가 온라인 역경매로 사온 P씨의 캐릭터였다.
『오전 8시 남편 출근준비 완료, 8시 30분 아들 등교. 11시 헬스클럽….』
브리핑 도중 P씨는 이동통신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P씨는 무선인터넷을 통해 가까운 식료품가게를 접속, 오늘의 메뉴를 골랐다. 청국장, 두부김치, 미역무침 등….
식료품가게는 30분 안에 음식물을 식탁까지 배달해주기 때문에 P씨는 주방에 가서 식탁만 차리면 됐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었다.
남편과 아이가 모두 출근한 뒤 컴퓨터 모니터에 앉아 자판을 두드렸다. 취미생활로 시작된 인터넷 영화동아리에 어제 본 영화 평론을 써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한시간 남짓 평론을 작성한 후 동아리 시솝에게 자료를 보냈다.
잠시 후 시솝의 얼굴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시솝입니다. 자료 잘 받았습니다. 역시 좋은 평론입니다.』 시솝이 보낸 동영상 파일이었다.
P씨는 서둘렀다. 불어나는 체중 때문에 고민하다가 헬스클럽을 끊었기 때문이다. 오늘 첫날이어서 서둘러야 했다.
결혼 이후 처음으로 방문한 헬스클럽은 예전과 달랐다. 사이버 여자 코치가 나와 헬스클럽의 각종 헬스기구 조작법을 상세히 알려줬다. 사이버 코치는 때로는 P씨의 잘못된 운동자세를 지적하고 운동량과 맥박수 등을 알려줘 시간가는 줄 모르고 땀을 뺐다.
샤워를 마치자마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단말기 액정화면에 비친 남편의 모습은 초조해 보였다.
『난데.』
남편은 연애시절부터 10여년간 「난데족」이었다. 실시간 동영상이 제공되는 이동전화단말기를 사용해 본인의 얼굴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데」가 인사말이었다. 구세대 같으니라고.
『내가 바빠서 이야기를 못했는데 오늘 회사에서 부부동반 모임이 있다는 것을 깜빡했어. 저녁 일곱시까지 회사 로비로 나와.』
남편의 건망증은 최첨단 시대에도 변함없었다. 국내 굴지의 M&A 전문기업 팀장까지 됐으면서도 남편은 여전히 아날로그 세대였다.
『오늘 친청엄마 생신인데, 어쩌지?』
『나도 알아. 그래서 걱정이야.』
그나저나 걱정이 됐다. 회사 부부동반이라면 옷차림도 신경써야 하는데.
P씨는 우선 이동전화단말기를 이용해 홈쇼핑에 접속하기로 했다. 최근 모 회사에서 만든 홈쇼핑코너에서 고급옷을 저렴한 가격에 임대해준다는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홈쇼핑 가이드가 화면에 나왔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P씨는 쇼핑가이드와 함께 회사 부부동반 모임에 필요한 옷을 골랐다. 자신의 사이즈를 이야기하자 쇼핑가이드는 모 연예인이 멜로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입었던 옷을 권했다. 4만원. 조금은 야해 보였지만 오늘 같은 날 튀는 것도 남편 출세를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아 과감하게 골랐다. 옷은 오후 4시까지 집으로 배달될 것이다.
P씨는 차에 오르자마자 차량에 장착된 내비게이션시스템을 이용해 최단거리 코스를 택했다. 아무래도 미용실을 가야 하고 화장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P씨는 무선인터넷을 이용해 미용실마저 예약했다.
남은 것은 친정어머니 생신.
P씨는 어머님이 좋아하는 제주 서귀포 수협에서 옥돔세트를 주문했다. 비행기로 수송하면 오늘 저녁 옥돔세트를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위안을 얻었다.
P씨는 시골에서 농장을 하고 계신 어머니에게 영상전화를 걸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부모는 중요한 존재였다.
화면에 나온 어머니는 더 늙어 보였다. 어머니는 나오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못 올 줄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 얼굴이라도 보니 얼마나 다행이니. 바쁘니 어쩔 수 있니. 다음에 보자.』
P씨는 눈물을 훔치며 서둘러 미용실로 향했다.
회사가 주재한 파티는 순조로웠다. 언뜻 본 남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부부동반 모임이 끝날 때쯤 남편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정보통신 기술의 승리야.』<김상룡기자 sr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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