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국지 아시아 IT 대로망>2회-부활하는 일본

◆99년 10월 4일 아침, 일본인들은 슬픔에 잠겼다. 전날 밤 모리타 아키오 소니 명예회장이 향년 78세의 나이로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그를 보며 전후 한창 경제를 일으키던 시절을 떠올렸다. 젊은이들은 즐겨 갖고 다닌 워크맨과 CD플레이어, 캠코더 등을 만든 사람이라는 점을 새삼 알게 됐다.

누구보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은 일본 전자업계 종사자다. 사실 일본 전자업계에서 모리타를 좋아하는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과 맞지 않는 개방적인 사고, 톡톡 튀는 돌발행위 등을 이유로 모리타를 「아니꼽게」 보는 사람도 적잖았다. 그렇지만 이들도 이날만큼은 슬퍼했다.

슬픔은 소니왕국을 건설해 일본을 전자산업대국으로 만든 그를 보낸 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 전자인들은 그의 죽음에서 침체된 일본 전자산업의 현주소를 보았다. 또 예전의 「화려했던 날들」이 다시 오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엄습했다.◆

일본인들은 최근 몇년 동안 세계 전자산업에서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었다. 빌 게이츠를 비롯해 찰스 왕, 제리 양, 래리 엘리슨, 칼리 피오리나, 제프리 베조스, 마이클 암스트롱 등 미국인들이 제 세상인 양 세계를 휘젓고 다녔다. 한물 간 것으로만 여겼던 잭 웰치까지 다시 무대에 등장했을 정도였다.

미국이 누구인가. 전자제조업을 내팽개쳤던 나라가 아닌가.

일본인들은 자국 전자산업의 침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인이 그 이유를 알게 됐을 때 세상은 이미 달라졌다.

가전제품의 시대는 가고 정보기술(IT)과 인터넷시대가 도래했다.

모리타 아키오의 죽음은 이러한 시대변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일본인은 5년전 이를 알아챌 기회가 있었다. 고작 상무에 불과한 이데이 노부유키가 오가 노리오 회장의 후임으로 소니의 실력자로 떠올랐을 때다.

이데이는 무려 14명의 선임 임원을 제치고 일약 사장으로 승진했다. 인사에는 새로운 디지털시대에 대응하자는 모리타 명예회장의 목소리가 담겼다. 이데이의 취임 일성도 「디지털시대 최고의 소니」였다.

그렇지만 그의 목소리는 곧 묻혀버렸다. 세계 전자산업을 장악했는데 두려울 게 뭐냐는 안일함이 일본 전자산업계에 깊숙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등장한 인터넷에 대해서도 일본 전자산업인들은 콧방귀만 뀌었다. 인터넷이 일본의 자랑인 휴대형 전자제품에도 적용되리라고 상상한 일본 전자인은 거의 없었다.

예상치 못한 것은 미국 IT산업의 「르네상스」뿐만이 아니었다. 일본 전자인들은 D램과 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 LCD)를 앞세운 한국의 득세를 전혀 예상치 못했다.

특히 90년대말 삼성과 LG가 세계 TFT LCD시장 1, 2위로 부상하자 일본 전자산업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기술을 달라고 떼를 쓰던 나라가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TV시장에서 한국의 강세다. 싸구려 제품만 만들 줄 알았더니 완전평면TV까지 곧바로 따라왔다. 이제는 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PDP)을 똑같은 시기에 만들겠다고 설쳐대고 있다.

가전왕국 일본 전자산업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전왕국을 한국에 고스란히 내줄 판이다. 한국 뒤에는 중국까지 따라붙고 있다.

그렇다고 IT로 눈을 돌리자니 미국의 벽이 너무 높다.

「사면초가」 일본 전자산업의 위기는 이 한마디에 압축됐다.

일본 전자인들은 한때 큰 꿈을 꿨다. 전쟁을 치르면서도 못이뤘던 「대동아공영권」을 전자산업에서 달성하겠다는 꿈이다.

후발주자인 한국과 중국, 대만 등을 휘하에 거느리고 세계 전자산업의 맹주로 자림매김한다는 전략이다. 예상대로 미국과 유럽은 가전산업을 포기했다.

다만 한국과 중국의 추격을 조심해야 했으나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기술력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80년대초 VCR, 90년대 중반 DVD의 표준을 만든 것도 한국과 중국에 대해 감히 일본을 넘보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 꿈이 현실화하는 순간 상황은 급변했다. 신기루에 불과했던 IT가 조금씩 가전왕국을 갉아먹더니 갑자기 온 세상을 뒤덮었다.

가전제품은 그저 인건비만 따내는 저부가가치 제품으로 전락했다. 일장춘몽이던가. 그렇게 꿈꾸어 왔던 대동아공영권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모리타 회장의 죽음으로 잠에서 깬 일본인들은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다시 신발끈을 매기 시작했다.

한국에 D램시장을 내줬으나 D램이 메모리반도체의 전부는 아니다. 플래시메모리 등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에 투자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TFT LCD도 대만업체들을 꼬드겨 한국과 경쟁시켰다. 이이제이 전법이다. 백색가전·디지털TV·휴대폰 등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한국 업체들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산업도 한국과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기가 식어 있으나 일본정부는 앞장서 비싼 통신료를 낮춰가고 있다.

전자산업 부흥의 의지는 역시 소니에서 시작됐다. 소니는 지난 5월 이데이 노부유키 사장을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로 승진시키고 안도 구니타케 부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신임 사장에 임명했다.

이데이 회장은 기존 사업과 인터넷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안도 사장은 기존 가전산업을 총괄한다. 전통시장과 첨단 미래시장을 모두 잡겠다는 야심이다

그동안 경영진 감축, 공장축소, 사업분리 등 구조개혁을 주도한 이데이 회장은 인사발표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번 인사로 인터넷 등 급변하는 전자산업 환경에 맞게 기존 사업전략과 웹전략을 보다 효율적으로 마련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안도 회장 역시 『지난 10년간 미국의 첨단회사가 시장을 주도했지만 소니사의 핵심사업인 하드웨어 사업이 다시 시장을 지배할 것』이라며 강한 의욕을 내비쳤다.

마쓰시타는 소니와 함께 전자왕국을 건설한 주역이다. 이 회사 역시 변신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지난 6월 취임한 나카무라 구니오 마쓰시타 사장은 IT시대에 맞게 「그룹의 IT화」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는 『IT시대의 기업은 생산시스템뿐 아니라 경리·인사 등 경영구조 전반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며 권한이양 등 미래형 경영체제를 서둘러 구축하고 있다.

나카무라 사장은 특히 마쓰시타의 자랑인 디지털 가전분야는 계속 성장할 것이라고 보면서도 『하드웨어는 IT산업의 또다른 축이며 여기에 서비스를 포함하는 솔루션 사업으로 가치를 높이겠다』고 말했다.

두 회사가 이처럼 변신을 시도하자 도시바·히타치·후지쯔 등 주요 전자업체들도 IT환경과 자사의 입지에 맞는 체질개선에 한창이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똑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도록 하라.』 모리타 명예회장이 생전에 남긴 명언이다. 일본 전자업체들은 이 말을 기억해냈다. 이들 일본 업체는 90년대 후반 저질렀던 실수를 거울삼아 2000년대에는 옛날의 영화를 되찾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 첫 희생양은 조금 컸다고 우쭐해하는 한국이 될 것이다. 한국보다 버겁기는 하겠으나 다음 차례는 중국이다.』

일본 전자업체들은 달라졌다. 예전처럼 한국과 중국 등 후발주자들을 무시하지 않고 이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국과 중국에서 배울 게 있으면 배우겠다는 태도다. 예전에는 한국의 전자업계가 주선한 기술세미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나 이제는 열심히 찾아다닌다.

지난 5일에는 서울에서 열린 국제디스플레이제조학회(IDMC)에 샤프·NEC 등의 연구소장들이 별 표시 안나게 다녀가기도 했다.

또 소니·마쓰시타의 가전 관계자들은 한국 가전업체들을 벤치마킹하거나 직접 방문하기도 한다.

이를 보며 한국 전자업체가 일본 업체만큼 힘이 세졌다고 보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D램 반도체 등 한국이 일본을 앞선 분야가 있으나 전체 전자산업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가전시장이 위축됐다고 하나 디지털가전이라는 새 옷을 입고 있는 과정이다. 디지털가전에서 일본은 여전히 세계 최강이다.

『한국업체들은 아직 적수가 아니며 격차를 더욱 벌여놓을 방법을 찾기 위해 접촉할 뿐이다.』

일본 전자인들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으나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점이 무섭다. 일본이 잠에서 깨어난 날, 세계는 다시 한번 일본의 무서운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만 일본은 한국과 중국 등의 전자산업이 더욱 활성화하면 동북아시아는 세계 전자산업의 중심이 되며 그럴수록 맹주로서의 자리는 더욱 빛날 것이라고 믿는다.

대동아공영권. 일정을 조정해야 하나 일본 전자인들이 버린 꿈은 아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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