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는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명의 시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오래전에 인쇄술이 인류의 문명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면 이제는 인터넷과 디지털이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아직까지는 두 개의 문명 사이에 양 다리를 걸친 어정쩡한 모습이지만 아날로그를 뒤로 하고 디지털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며 그 걸음이 더욱 빨라질 것
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영화 「매트릭스」는 디지털 혁명으로 인류가 새롭게 만날 수 있는 신 문명의 극단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어느날 갑자기 만나는 세계는 모든 것이 0과 1이라는 디지털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다. 매트릭스의 세계는 이제까지 인류가 접하고 향유해온 물리적인 세계를 그대로 복제하고 있으며 개인은 그 속에서 모든 것을 경험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세계는 어디까지나 가상일 뿐이다.
2000년 9월 현재 우리도 디지털 문명의 일단을 경험할 수 있다. 편지 대신에 전자우편을 주고 받고 사이버 공간 속에서 모르는 사람과 ID만으로 대화를 나눈다. 전자상거래를 통해 피자와 콜라를 주문하고 대금도 사이버 머니로 결제를 한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전자책 파일로 다운받아 읽고 음악이나 영화도 디지털 파일로 해결한다. 스타크래프트의 배틀넷에 접속해 전세계 게이머와 대전을 벌이고 휴대폰으로 보고 싶은 영화 정보를 검색해 티켓 예매를 할 수도 있다.
혹자는 이같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N세대의 전유물로 축소해석할 지 모른다. 하지만 디지털 혁명이 이미 우리의 경제·산업·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디지털 혁명은 20세기 산업 사회의 모더니즘적인 세계관과 자아관을 해체시킨다. 물리적 세계는 인터넷과 디지털이 만들어 내는 가상의 세계(사이버 월드)로 대체되며 그 속에서 개인은 수십개의 디지털 자아(ID)를 갖는 가상의 주체로 바뀐다. 인류는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디지털 존재를 생산하고 교환, 소비하게 되며 개인은 다른 디지털 자아를 만나 거대한 사이버 커뮤니티를 이루게 된다.
인류가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고 지식을 축적해온 도구였던 언어도 디지털화함으로써 문화·예술·교육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마련해준다. 말에서 문자, 활자를 거쳐 디지털화된 언어는 문화와 지식의 생산·저장·소비 구조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고 있다. 특히 전자책으로 대표되는 출판의 디지털화는 새로운 인쇄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문자 위주의 각종 텍스트가 그림·사진·음악·동영상 등이 어우러지는 멀티미디어 콘텐츠로 바뀌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문화 상품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던 사용자는 적극적인 상호 작용을 하는 사용 주체로 변화한다. 소위 하이퍼 텍스트화된 문화 상품은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소비자의 선택에 위해서 변화하는 열린 작품으로 바뀐다. 스타크래프트라는 컴퓨터 게임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게이머가 어떤 아이템과 전략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시나리오가 펼쳐진다. 특히 배틀넷이라는 대전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게이머와 게임을 할 경우 그 결과는 예상을 불허할 정도로 다양하다.
최근에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다가 어느 시점에서 스토리 전개를 선택해 서로 다른 결말을 만들어 감상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무비가 시도되고 있다. 안방문화의 대명사인 TV도 지난 8월말 SBS가 시험방송을 시작한 디지털 방송으로 디지털 혁명의 회오리 속에 휩싸일 것이며 문화 전반은 물론 예술·교육 등에 각 분야에 걸쳐 일대 혁명이 예고되고 있다.
모든 급격한 변화에는 부작용이 따르듯이 디지털 혁명에도 역작용과 해결해야 할 문제점은 있다. 인터넷 중독증이니 컴퓨터 게임 중독증이니 하는 병리적인 현상도 문제지만 디지털이 인류 문명의 어두운 뒷면을 폭발적으로 확대 재생산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포르노물의 대량 유통에서 볼 수 있듯이 디지털화된 사이버 세계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이기주의적 욕망이 대량으로 분출될 때 디지털 혁명은 타락한 천사로 전락해 인류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기존 아날로그 매체와의 조화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인터넷 닷컴 기업들이 오프라인을 배제한 채 온라인 부문에만 치중해 수익모델 창출에 실패했듯이 디지털 문화 혁명이 기존의 아날로그 미디어를 배제하거나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될 경우에는 실패한 쿠데타로 그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인류가 이제까지 쌓아온 구 문명을 아우르면서 상호보완하는 형태로 디지털 혁명을 추진해가야 할 것이란 지적이다.
이제까지의 디지털 혁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시작에 불과하다. 특히 정보통신 기술의 한계 때문에 디지털화가 아직까지는 인류가 보고 듣는 시청각의 영역에 한정돼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취각·미각·감각 등의 영역으로 확대됐을 때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새로운 문명과 이를 향유하는 신인류가 등장할 것이다.
이미 감각을 이용한 체험 게임기, 옷처럼 입는 컴퓨터, 냄새와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디지털 영화 등이 등장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인류의 오감은 물론 상상력까지 디지털화해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여주는 세계를 경험할 날이 그렇게 멀지는 않은 것 같다.
<이창희기자 changh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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