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로 승부하는 벤처세계에 기존업계의 악습인 겉치레가 스며들기 시작하면 금방 병이 든다. 겉치레에 신경쓰다 보면 경쟁력의 원천인 기술개발이나 경쟁력 향상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특히 매출이나 실적 등을 뻥튀기 하는 것은 투명경영이 생명인 벤처로서는 눈앞의 이익을 좇다 더 큰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될 공산이 크다.
현재 일부 벤처들은 해외수출시 위약금 조항을 달지 않고 계약을 맺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출실적을 높이기 위해 불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는 것은 물론 심지어 아예 언론 발표를 목적으로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와 계약을 맺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경우 계약이 파기되더라도 아무런 제재나 보상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계약 자체만으로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를 굳이 대대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처음부터 겉포장이 일차적인 목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지난 4월 22일 정보통신부는 제 45회 「정보통신의 날」을 맞아 정보통신 발전에 공헌한 인사 55명에게 훈포장을 수여했다. 그중 한명인 L사의 L 사장은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가 대통령상을 받기까지는 여러 가지 공적이 있지만 열악한 소프트웨어 분야의 수출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해 8월 프랑스 모사와 1년간 200만달러의 자사 검색엔진 수출 계약을 맺은 것과 9월 일본 모사에 3년동안 1500만달러(약 180억원)의 수출계약을 맺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한 바 있다.
소프트웨어업체가 단독으로 1500만달러 수출계약을 체결한 것은 국내에서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하지만 1년이 지난 현재 L사가 프랑스와 일본 두 업체와 거래한 수출물량은 전무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업체는 사장과 직원들의 명함에 대통령표창을 의미하는 로고를 삽입해 사용하고 있을 뿐 계약 당시에 비해 수출에는 별 진척사항이 보이지 않고 있다.
네트워크 장비업체인 K사의 경우 지난해 미국의 한 장비업체와 공동 개발·공동 생산 등 포괄적 제휴를 체결하고 상당한 금액의 제품 수출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난해 추진될 것으로 예상됐던 수출은 아직까지 인증문제, 제품개발 미비 등 이러저러한 문제로 한발짝도 진전되지 않고 있다.
위의 두가지 사례의 경우 비록 악의적으로 투자자나 언론을 속이려 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밖으로 드러나고 있는 계약내용이나 진척상황을 볼 때 해외수출을 과대 포장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현재 L사는 프랑스 업체와 계약기간이 지났음에도 위약금을 받지 않은 상태고, 일본 업체와는 계약기간이 남아 있지만 180억원 규모의 소프트웨어를 기간내에 판매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본 업체가 앞으로 남은 2년 안에 L사 제품을 수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보상받을 수 있는 어떤 조항도 계약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L 사장은 이에 대해 『일본과의 수출계약도 아직 유효하다. 초기 제품에 하자가 생겨 잠시 보류된 상황이지만 현재는 이것이 개선되어 조만간 수출이 이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는 벤처만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모순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관계전문가들은 벤처의 경우 위장수출 발표를 하거나 수출물량을 부풀린다 하더라도 제도상 특별한 법적 제재를 받지 않는 반면 실적이 나쁘면 특혜나 지원금이 중단되기 때문에 언제나 뻥튀기의 유혹에 노출돼 있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해외수출실적을 부풀려 자사의 기술력을 만방에 알려 주가를 올리거나 포상이나 투자유치에도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뒷일은 나중에 감당하자는 한탕주의에 물들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과거 수출드라이브정책이 한창이던 시절, 국내 많은 업체들이 배에다 물건을 잔뜩 싣고 바다에다 버리고 돌아오거나 아예 돌을 싣고 나가면서 수출실적으로 잡아 보고한 경우가 허다했다. 이같은 웃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도 알고 보면 편법이나 불법에 대한 제재보다 수출실적이 좋게 나오면 돌아올 떡이 더 컸던 제도적 모순 때문이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주인공인 벤처기업가가 21세기에 또 다시 과거 선배 기업인들의 악습을 되풀이하는 우는 절대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벤처를 아끼는 일반 국민들의 정서다.
벤처업계의 한 관계자는 『힘없는 벤처가 대외협상을 하다 보면 현실상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며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계약부터 체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같은 사정을 십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벤처들은 공적발표시 특별히 불리한 계약내용이 있다면 이를 스스로 공개해야 한다. 지금처럼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계약을 체결하고 마치 실적을 이룬 것처럼 발표할 경우 오히려 벤처의 생명인 도덕성에 치명적인 훼손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증권업계의 전문 애널리스트들은 한결같이 『몇몇 업체들의 구태 때문에 전체 벤처기업들이 도덕성을 의심받고 벤처 위기론을 증폭시키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며 벤처기업가들의 투명경영 자세를 강조했다.
<유병수기자 bjor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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