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정보통신 산업을 움직이는 사람들>27회-반도체(1)

국내 전자제품 수출의 37.1%, 전체 수출의 14.4%를 책임진 사람들. 반도체업체 경영자들은 이처럼 국내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이 웃을 때 국내 경제는 활력을 찾으며 이들이 수심에 차있을 때 경제는 어김없이 침체다.

2000년 여름, 반도체업체 경영자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제2의 IMF설도 간혹 나오나 반도체 경기의 호조에 힘입어 국내 경제 전반은 활기를 띠고 있다.

반도체업체 경영자들은 조금 과장되게 말해 「한국을 먹여 살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리 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데 비해 일반인에겐 덜 알려졌다. 비밀이 많은 업종의 특성상 이들은 좀처럼 언론이나 공개된 자리에 나타나기를 꺼리는 편이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반도체 경영자들은 누구인가.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반도체업체에서 연구개발 출신이 득세할 것임을 안봐도 알 것이다. 반도체는 전기·전자는 물론 물리·화공 등 여러 이공 학문을 결합한 결과물이어서 누구나 쉽게 반도체에 접근할 수 없다.

반도체업체들은 말단 연구원부터 「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두 연구개발자 출신이다.

전공은 전기공학·전자공학이 아니면 재료공학이며 물리와 화공 출신도 이따금 눈에 띤다. 출신학교는 학부의 경우 서울대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스탠퍼드·MIT 등 미국 명문대의 석박사 출신도 적잖은데 이들은 반도체사업 초반 영입한 해외파들이다.

해외파도 서울대나 KAIST 출신이 많아 반도체업체 사람들은 이래저래 선후배 관계로 얽혀 있다.

그렇다고 반도체업체 사람들이 학연에 기댈 것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해서는 치열한 국제경쟁의 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사실 반도체 업종만큼 실력만으로 겨루는 업종을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경쟁풍토는 반도체업체의 전문경영인제 정착에도 일조했다. 워낙 전문지식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곳이라서 반도체사업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삼성이나 현대도 초기 설립때를 제외하곤 전문경영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대표를 윤종용 부회장이 맡고 있으나 반도체 총괄대표를 맡은 이윤우 사장이 반도체부문 내부의 인사와 관리를 포함한 총괄업무를 맡는다. 현대전자 역시 전반적인 거시경영는 회사 얼굴인 박종섭 사장이 맡았으나 반도체부문의 직접적인 운영은 박상호 반도체 총괄사장의 몫이다.

국내 반도체업계의 리더들은 거의 삼성전자와 현대전자(구 LG반도체 포함)에 몰려 있다.

인력이 가장 많은 데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인력을 배출해 중견 장비업체나 소자업체는 물론 주문형반도체(ASIC) 벤처기업의 경영진으로 폭넓게 포진돼 있다.

이때문에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의 경영진을 분석하면 국내 반도체산업의 경영 현주소를 절반 이상 알게 된다.

이윤우 삼성전자 사장(54)은 이 회사뿐만 아니라 국내 반도체산업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지난 상반기 국내에서는 4대 반도체산업협회장에 취임하고 국제적으로는 세계반도체협의회(WSC) 의장을 맡은 것이 그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합리적이면서 국제적인 감각도 갖춰 반도체업체의 얼굴로 이만한 적임자는 없다. 삼성전자의 대표가 바뀌어도 그만은 바뀌지 않을 정도로 윗사람으로부터의 신뢰가 두터우며 대인관계도 원만하다.

대표이사로 승진시킨 휘하 부사장들에게 권한을 모두 이양할 정도로 맡기는 타입이나 중요한 결정에 대해서는 직접 공부하기도 해 아랫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도 잦다.

이윤우 사장에 대응할 현대전자의 인물은 박종섭 사장(53)이다. 박 사장은 직무상으로 삼성전자의 윤종용 사장과 같은 자리에 서야 하나 반도체사업에 대해 크게 의존하는 현대전자의 특성을 고려했다.

김영환 고문의 후임으로 대표이사를 맡은 박 사장은 이공계 출신이 즐비한 반도체업계에서 이색적일 정도로 경영학 출신이다. 지난 3월 대표이사로 취임하자마자 매출보다 수익 위주의 경영을 선언한 것도 그의 전공과 무관치 않다. 6개월 만에 고질적인 부실을 대거 털어낸 것에 대해 회사 안팎에서는 매우 후한 점수를 준다.

박종섭 사장은 이윤우 사장처럼 자율경영을 중시해 반도체사업의 경우 동갑내기 박상호 부문 사장에게 철저히 맡겨둔다.

국제적인 감각면에서 박 사장은 오히려 이윤우 삼성 대표를 앞선다. 93년 이후 줄곧 해외법인에 머무른 박종섭 사장은 95년 미 맥스터사 사장을 맡아 미 상장기업의 첫 한국인 사장이라는 이색적인 기록도 갖고 있다.

박종섭 사장과 이윤우 사장은 철저한 자율경영은 물론 그룹 오너의 각별한 관심, 강력한 리더십 등 여러 모로 비슷하다.

두 사장은 모두 전력이 화려한 장수를 휘하에 두고 있다. 이윤우 사장에게는 △메모리분야 황창규 부사장 △시스템LSI분야 임형규 부사장(47)이 포진했다. 두 부사장 모두 지난해말 대표이사로 승진해 사실상 이윤우 대표의 뒤를 이을 삼성 반도체 분야의 차세대 주자들이다.

황창규 부사장은 서울대와 MIT 박사 출신으로 10년전 삼성호에 합류해 차세대 메모리 개발을 진두지휘해왔다. 삼성전자가 중시하는 메모리사업을 전담하고 있다는 게 그의 미래를 더욱 밝게 한다.

임형규 부사장은 삼성전자가 비중을 높이고 있는 비메모리사업의 사령탑으로 황 부사장과 함께 「포스트 李」에 대비하고 있다.

대표이사 부사장 옆으로는 권오현 부사장(시스템LSI ASIC사업팀장, 48), 서광벽 전무(〃CPU사업팀장, 46), 이문용 전무(반도체연구소장, 48) 등이 막강한 삼성전자 반도체부문의 위용을 과시한다.

현대전자의 반도체사업은 박상호 사장(53)이 총괄한다.

박종섭 사장은 큰 그림을 제외하고는 웬만한 결정을 모두 맡길 정도로 박상호 사장에 대한 신뢰가 높다.

박상호 사장이 현대전자에 합류한 것은 고작 1년전이다. 20여년 동안 미국 HP·IBM 등에서 기술담당 임원을 맡아오다가 지난해 현대전자의 반도체 부문장으로 영입됐다.

미국 기업에서의 오랜 근무에서 익힌 합리성과 철저한 업무 성취력으로 업무를 장악해 현대전자의 분위기를 「확 바꿔 놓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동갑내기 박종섭 사장과는 환상의 콤비로 미국식 경영기법을 현대전자에 뿌리내리게 할 것이라는 게 안팎의 반응이다.

박상호 사장과 함께 현대전자 반도체 부문을 이끄는 인물로는 기술분야에 김세정 최고기술경영자(CTO)와 생산분야의 선병돈 생산총괄 부사장(58)이 있다.

메모리연구소장을 겸임한 김세정 부사장(50)은 최근 후임 메모리연구소장으로 영입한 서울대 박영준 교수(반도체공동연구소장, 48)와 아울러 현대전자의 연구개발과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총지휘하고 있다. 박영준 소장은 다양한 연구개발조직을 체계화하고 산학협동을 이끌어와 현대전자의 기술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적임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형적인 테크노크래프트인 구 LG반도체 출신 선병돈 생산총괄 부사장은 반도체 빅딜 이후 이질적인 문화의 통합을 이끌어낼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있다.

현대전자의 차세대 주자로는 시스템IC본부장을 맡고 있는 허염 전무(48)가 있다.

서울대·KAIST·스탠퍼드 등 정통 코스를 밟은 허염 전무는 치밀하면서도 공격적인 경영방식으로 비메모리사업을 확대하면서 경영자 수업을 받고 있다.

삼성전자와 달리 현대전자가 전무급이 사업부장(본부장)을 맡고 있는 것은 지난해 반도체 빅딜으로 이희국 부사장 등 LG 출신 고위임원들이 친정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현대전자도 체계를 잡으면서 강진구-김광호-윤종용-이윤우에서 진대제·황창규·임형규 등으로 이어지며 매년 풍년을 이룬 삼성전자와 같은 같은 길을 가려 한다.

삼성전자의 주도세력이 스탠퍼드대 출신이라면 현대전자는 AT&T벨연구소를 비롯한 기업 출신이 주도한다.

현대전자가 앞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칠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삼성전자는 이에 차세대 기술우위를 점하는 전략으로 나설 듯하다.

두 회사의 핵심 경영진 나이는 40대 말이다. 이윤우 사장이 총괄대표로 발탁됐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중책을 맡았다.

2000년대 후반을 겨냥한 중역간의 물밑경쟁이 조만간 가시화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전문가 집단이 이끄는 반도체업종의 특성상 차기 대권구도는 실력과 일부 사업운만으로 판가름될 가능성이 높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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