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지고는 안산다.」
국내 주요 전자부품소재업체들에 무차입 경영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중소 부품업체들은 물론 대형 종합부품업체에 이르기까지 경쟁적으로 무차입 경영을 선언하는가 하면 이미 이를 달성했다는 기업들도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국내 부품소재업체들의 무차입 경영 현황과 그 방향을 집중 조명한다. 편집자
빚을 제로(0)로 만들겠다는 이러한 무차입 경영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허튼 소리」로 여겨졌다.
기업 경영자들은 금융기관과 거래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돈을 빌려 투자할 수 있는데 뭣하러 자기 돈으로 투자하느냐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시각은 대기업일수록 많았다.
그러나 IMF한파가 닥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이 대출을 억제하면서 자금시장은 꽁꽁 얼어붙었고 기업들은 빚을 낼 수가 없었다. 그 여파로 거꾸러지는 중소기업들이 속출했다.
대기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우그룹이 붕괴되고 현대그룹도 일부 계열사의 극심한 유동성 위기로 흔들리고 있다. 일부 중견그룹들도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등 사상 초유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동안 말로만 그쳤던 무차입 경영은 이제 모든 부품업체들에 유일한 「살 길」로 나타났다.
특히 벤처열풍 속에서도 소외되다시피했던 부품소재업체들의 어려움은 가중됐다. 생존의 기로에 서 있는 상황에서 신규 설비나 라인에 대한 투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다행히 전자제품 시장이 활성화하면서 올들어 부품소재업체들의 체감경기는 되살아났다.
IMF위기 동안 빚지고 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실감했던 부품소재업체들은 어느 정도 위기를 벗어나자 무차입 경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현대전자·대덕전자 등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물론 중소 부품업체들도 잇따라 무차입 경영을 선언했다.
외형 확대와 이를 위한 차입 경영의 시대는 이제 내실 경영과 무차입 경영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현황=올들어 대외적으로 무차입 경영을 선언한 부품소재업체들은 40∼50개사다.
정부가 적정 수준으로 제시한 부채비율 200%의 4분의 1에도 못미치는 기업들도 적잖다. 심지어 부채비율이 제로인 업체도 등장했다.
부채비율이 평균 300∼400%에 달했던 1∼2년 전과는 사뭇 달라진 셈이다.
무차입 경영이 가능했던 것은 아무래도 최근의 경기호전에 따른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매출과 경상이익이 늘어나면서 그동안 누적된 빚을 갚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다른 업종에 비해 반도체 장비업체에서 무차입 경영이 활발한 것도 이러한 상관관계를 한눈에 보여준다.
이들 업체는 반도체업체의 설비투자 확대로 매출과 경상이익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며 부채비율이 많아야 100%대로 사실상 무차입 경영을 실현하고 있다.
주성엔지니어링(대표 황철주)은 0%의 부채비율로 완전한 무차입 경영을 펼치고 있으며 미래산업(대표 정문술)은 10%대로 단기부채가 전혀 없다. 유일반도체(대표 장성환)는 22%, 케이씨텍(대표 고석태)은 25%의 매우 낮은 부채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장비업체 관계자들은 『장비시장의 호조가 앞으로 2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보여 반도체 장비업체들은 올해를 고비로 사실상 완전 무차입 경영체제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콘덴서업체인 쎄라텍(대표 오승용)도 지난 상반기 매출과 순이익이 70% 이상 늘어난 데 힘입어 하반기에는 차입금 전액을 상환해 무차입 경영에 돌입할 예정이다.
무차입 경영의 견인차는 매출호조뿐만이 아니다. 디스플레이소재업체로 대우그룹에서 일본 아사히글라스로 넘어간 한국전기초자는 「마른걸레도 다시 짜는」 혁신활동으로 확보한 이익을 빚갚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이 회사는 지난 97년 3500억원에 이르던 차입금을 98년 1400억원, 지난해 880억원으로 줄였으며 올 상반기에는 다시 400억원으로 줄였다. 부채비율도 지난해 141%에서 올해 49%로 떨어졌으며 하반기에는 더욱 하락할 전망이다.
이자가 싼 자금만 차입해 쓰는 자금운영도 무차입 경영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중전기업체인 이티아이(대표 배문영)는 정부육성자금이나 외국자본 등 저리의 자금만 빌려 써 동종업계에서는 낮은 수준인 80%의 부채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전망=일부 부품소재업체들이 무차입 경영을 추진하고 있으나 선진업체에 비교하면 아직도 멀었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일본에서는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부채비율이 100%를 넘는 기업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이는 기업들의 무차입 경영 의지에 따른 것이기도 하나 기업 대출이 활발하며 금리가 낮은 일본 금융시장의 풍토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이에 비해 국내 금융시장은 제조업, 특히 중소 부품업체에 대한 대출에 인색하며 이자율도 높다. 이는 부품업체에 대한 대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에 비해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고 있는 중소 부품업체들을 좌절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금융구조는 당분간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부품업계에 이는 무차입 경영은 「이 참에 빚없이 살자」는 외침과 다름 아니다.
업계는 일부 부품업체에서 시작한 무차입 경영이 앞으로 전 부품업계로 확산될 것으로 관측한다. 특히 거래소나 코스닥에 상장 및 등록한 업체들의 경우 무차입 경영은 「거부할 수 없는 절대 명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영호 한국전기초자 상무는 『예전에는 개인투자자들이 매출을 묻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제는 거의 없으며 구체적인 손익구조를 제시하면서 중장기 비전이나 심지어 경영자의 철학을 묻는 투자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의 높아진 수준에 걸맞은 재무운영체제를 갖춰야만 주가를 높이고 손쉽게 자금을 유치할 있게 됐다는 지적이다.
경상이익의 절대액만을 중시하던 시절, 기업들의 재무전략은 「얼마나 많은」 차입금을 끌어들이느냐가 관건이었다. 이제 경영자들의 관심은 「얼마나 건전하게」 자금을 융통하느냐로 집중되고 있다.
최근 일부 부품업체들의 무차입 경영 선언은 이러한 시대 변화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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