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용주의 영화읽기>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미국 영웅 만들기」는 이제 과거의 역사로 돌아가 제목에서부터 당당하게 그 의도를 드러낸다. 「인디펜더스 데이」나 「고질라」 등을 통해 대작에 대한 기대감과 「속 빠진 강정」이라는 비평이 오갔던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강점은 사실 영화적인 완성도를 논하기에 앞서 「어떤 영화를 만든다」는 선전포고를 통해 화제를 불러일으키는데 있는 듯하다.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도 할리우드의 스타급 스탭들이 대거 기용되어 만든 영화답게 화려한 스펙터클이 선보이며 상업적 재미의 구조들을 빠뜨리지 않고 활용한다. 애국주의와 부성애, 인간의 이중적 모습들이 점철된 이 영화는 너무나 확연한 선악구조와 어린이들을 통해 강요되는 감동, 전장의 참혹상을 그려낸 액션신 등으로 인해 감독의 전작들보다는 한결 무장된 재미를 선사한다. 너무나 미국적인 구태의연한 낡은 애국주의에 대한 반감은 사실 이제 의도된 기획처럼 느껴질 정도다. 멜 깁슨의 무게감을 느끼게 해주는 주인공 벤자민의 역할은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늪 속의 여우」란 애칭으로 불리며 식민지군의 영웅이었던 프랜시스 매리언이란 인물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캐릭터다.

18세기 사우스 캐롤라이나. 아내를 잃고 7명의 아이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벤자민 마틴은 과거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전설적인 인물이다. 미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13개주 연합의회는 영국의 탄압에서 벗어나고자 조지왕과의 전쟁을 선포하지만 전쟁의 참혹상을 누구보다 잘 아는 벤자민은 전쟁을 반대한다. 하지만 큰아들 가브리엘은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군대에 합류한다. 2년 후, 영국군의 기세가 점점 강해지는 가운데 벤자민은 둘째 아들이 영국 장교의 총에 맞아 살해당하고 가브리엘이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자 총과 도끼를 들고 영국군을 향해 복수를 시작한다. 그는 가브리엘과 함께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민병들을 모아 적을 교란시키고 영국군들은 그를 잡기 위해 민병대의 가족이 살고 있는 마을을 무참히 불태운다.

인간병기를 방불케 하는 이 독립투사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사실 애국이라는 거창한 이념보다 오히려 가족을 죽인 자들에 대한 처절하고 잔인한 복수에 가깝다. 1700여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는 근대적인 전투장면보다 벤자민의 개인기가 훨씬 생동적으로 돋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쟁에 등을 돌리던 한 영웅이 전쟁에 참여하고 그 스스로도 자신의 전쟁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마지막 의문을 품지만 결론은 역시 할리우드 영화의 규칙을 외면하지 않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로버트 로댓의 각본과 멜 깁슨의 연기는 2시간 30여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을 보상해 주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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