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소재산업의 르네상스를 위해-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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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반도체를 포함한 국내 전자부품 수출액은 280억달러로 전체 전자제품 수출규모의 54%에 이른다. 올들어 상반기에도 일부 대형 부품업체들은 몇조원, 몇천억원의 천문학적 매출이니 경상이익이니 하며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국내 전자부품산업의 이같은 위상은 전자부품업체들이 밀집한 몇몇 공단에 가보면 순식간에 무너진다.

지난달 중순 부평공단의 한 중견 전자업체의 정문. 30대 초반의 남자가 문을 나서는 사람마다 다가가 말을 건넨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물었더니 사채업자라고 한다. 중소 부품업체가 받은 어음을 그 자리에서 할인해준다.

『한동안 이곳에 나오지 않았는데 요즘 중소기업의 자금난이 심화된다길래 다시 나왔죠. 주식시장도 별 재미 없고….』

한 중소업체 사장은 이 사채업자와 몇마디 나누더니 불과 몇분전에 받은 4개월짜리 어음을 「깡」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것이 세계 전자제품 생산 3위인 우리나라 부품·소재산업의 현주소다. 전체 업체수의 97% 이상인 중소 부품·소재업체들은 호황국면과 무관하게 시름시름 앓고 있다.

조만간 없어지리라 믿었던 어음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자금의 동맥경화로 결제기간만 연장됐다. 은행 문턱은 여전히 높다.

인력난도 심각하다. 중소 전자부품업체들이 밀집한 구로·반월·남동공단에서 마주치는 게시판에는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구인란만 듬성듬성 붙어있다.

『있는 사람도 빠져나가려는 판에 인력채용을 사실상 포기하는 게 낫겠습니다.』 구로공단의 한 중소부품업체 사장 L씨는 이렇게 한숨을 내쉰다.

국내 부품산업의 간판인 반도체산업만 해도 최근 메모리분야의 호황으로 「떼돈」을 버나 비메모리 제품은 거의 다 외산 제품을 사다 쓴다.

이러한 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책당국은 해마다 획기적인 육성책을 내놓는다. 그러나 정작 부품·소재업체들은 이를 「반복되는 유성기판」쯤으로 흘려듣는다.

부품·소재산업 육성에 대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중인 산업자원부의 김칠두 국장은 『80년대 후반부터 추진해온 각종 지원정책의 효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현실성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할 정도다.

부품·소재업체는 나름대로 줄기차게 노력해왔다. 그래도 별다른 진전이 없다.

대기업은 여전히 대기업이고 중소기업은 그대로 중소기업이다. 작은 부품업체가 몇년 뒤 중견기업으로, 더 지난 다음에는 대기업으로 커가는 성공신화가 우리 부품산업 역사에는 없다.

이러한 마당에 일등만이 살아남는 글로벌 소싱, 무한 기술경쟁시대라는 태풍이 몰려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내 부품·소재산업은 채 3%도 안되는 대기업만 살찌우는 「절름발이」 산업이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번에 전자신문이 한국전자부품연구원과 공동으로 「전자부품소재산업에 르네상스를」이라는 기획 연재물을 25회에 걸쳐 매주 싣기로 한 것은 이러한 우려가 기우로 그치게 하기 위한 시도다.

기획 연재물은 국내 부품·소재산업이 지금 과연 어디에 서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국내 전자산업의 뼈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살펴볼 것이다.

한때 첨단산업으로 각광받다가 IMF 한파로 휘청거린 후 이제는 벤처열풍에 밀쳐나 찬밥 신세인 국내 부품·소재산업이 다시 부흥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대답은 업계가 앞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달려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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