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두뇌 엑소더스>해외사례와 전망(하)

삼성전자가 미디어링크, 넥스컴 등 2개 벤처업체를 상대로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불거진 인력유출 문제는 사실 국내만의 문제는 아니다.

벤처붐이 가장 먼저 강타한 미국의 경우도 인력공급이나 이동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처하는 모습은 국내와는 다르다는 게 현지와 정통한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해외사례=미국의 경우 인력이동이 국내에 비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다. 이는 고용의 유연성과 직업선택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는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상호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전체 산업경쟁력 강화를 유도한다는 미국 정부의 방침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시스코시스템즈코리아의 한 관계자는 『시스코의 경우 경쟁사 이직에 대한 어떠한 제약이 없다』라며 『다만 일부 핵심 인력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동종업계 이직에 대해 일정 부분 제한하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최근 라우터분야에서 시스코시스템스를 위협하고 있는 주니퍼네트웍스도 사실 시스코출신 엔지니어가 설립한 회사다. 루슨트테크놀로지스도 퇴직원이나 입사서류에 이직을 제한하는 어떠한 규제도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신생기업과는 달리 역사가 오래된 기업의 경우에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모토로라는 입사시 모토로라 재직시 취득한 기술이나 비밀은 이직할 경우에도 2년동안 발설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입사원서를 받는다. 그러나 모토로라측은 사실상 이러한 각서를 제출하더라도 이것은 개인의 도덕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동종업계 이직으로 소송이 제기된 적은 없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판례에서는 최근과 같이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상황에서는 1년간의 취업금지 규정은 효력이 없으며 영업비밀을 보호하기 위한 동종 경쟁업체 취직금지를 약정하더라도 그 기간을 3개월로 매우 짧게 한정토록 하고 있다.

아시아지역은 미국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일본의 경우 대기업간에는 상호협정을 통해 대기업간 전직을 아예 막고 있다. 이는 평생직장 개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직장을 저버린 사람의 경우 신의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며 아무리 유능한 인재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알려졌다. 싱가포르의 경우 대부분의 IT기업이 입사시 1년동안 동종업계로 이직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경쟁업체로 전직할 경우에 한달 이내에 통보한다는 규정도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보통 하루만에 퇴직절차가 마무리되는 게 관행이다.

◇향후 전망=업계에서는 이번 소송을 계기로 국내 고용정책 전반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 벤처업체 사장은 『기술인력 수급을 위해서는 현재로서는 대기업의 인력을 수혈할 수밖에 없다』며 『1년간 동종업계 취직금지 규정이 지켜질 경우 국민의 직업 선택권은 크게 제한될 수 있으며 국내 벤처업체들의 인력수급도 중단되어 사실상 벤처기업 활성화를 통한 균형적인 산업발전은 요원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1년간의 동종업계 이직 금지 기간도 재고돼야 하며 동종업계로 표시하고 있는 이직범위를 좀더 명확히 명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대기업들은 『직원 한명의 연봉이 2000만원이라고 가정할 경우 이 직원을 전문가로 육성하기 위해서 투입되는 간접비용은 4000만원에 달한다』며 『이번 소송을 통해 인력육성노력은 전혀 기울이지 않고 대기업 직원 빼내기를 통해 사업을 진행하려는 벤처업체들의 못된 관행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쪽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만큼 이번 소송은 법정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질 전망이다. 만약 벤처업체가 패소한다면 이와 유사한 소송이 잇따를 것이며 벤처업체들은 인력수급의 어려움으로 상당한 타격이 예상된다. 또 유사직종으로 진출하려는 대기업 직원들의 움직임에도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반면 삼성전자가 패소할 경우, 직원들의 엑소더스는 공식화돼 인력유출은 봇물처럼 터질 가능성도 높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이번 소송이 법적인 문제외에도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새로운 고용관행의 정립이라는 의미도 있다』며 『산업경쟁력 강화측면에서 어떤 고용관행이 바람직한지도 고려돼야 할 것』이라고 견해를 표시했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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