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급물결 전자상가>(6)가속화하는 「패밀리화」

『형님, CPU 500㎒짜리 100개만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하드(하드디스크드라이브) 15기가짜리 재고가 좀 있는데 가져가실래요?』

선거일을 하루 앞둔 지난 12일 용산의 한 컴퓨터부품 유통업체 사무실. K사장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상호 윈윈을 위한 협력을 타진하고 있다.

비슷한 시각 한 하드디스크드라이브 유통업체 매장.

『박 사장! 나 김인데…. 저쪽 팀이 10만원선을 오늘 오후부터 무너뜨렸다는데 물 한번 먹일까?』

환율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CPU나 메모리 같은 품목은 그날 그날 해외의 딜러가격이 달라지고 용산시세도 달라지는 까닭에 용산의 유통업체들은 이처럼 하루를 전쟁처럼 보낸다. 컴퓨터부품의 전반적인 가격인하로 이윤이 빠듯해지면서 딜러들이 단 몇천원에도 거래처를 바꾸기 때문에 요즘 웬만한 총판업체들은 「아군」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고 있다.

집단상가에서의 이같은 공조체제는 오래전부터 「거래처」 또는 「협력업체」라는 이름으로 정착된 지 오래지만 최근 들어 더욱 유대관계가 강화되고 범위도 넓어지고 있다. 특히 유통업체들이 IMF시대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인터넷 쇼핑몰 등으로부터 저가공세에 직면하면서 살아남기 위한 합종연횡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전자상가에서는 이들을 「패밀리」로 일컫는다. 대개 한 패밀리는 적게는 5∼6개 업체에서 많게는 10여개의 업체로 이뤄진다.

이러한 패밀리화는 크게 같은 브랜드를 놓고 정품을 취급하는 대리점 진영과 해외의 유통업체로부터 직접 들여오는 그레이 진영의 대결구도로 표면화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레이 제품을 들여와 값싸게 판매하는 업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국내 대리점들이 하나의 패밀리로 뭉쳐 정보를 교환하고 시장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최근 들어 같은 브랜드에 국한되지 않고 동종업계 타 브랜드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를테면 하드디스크드라이브 시장의 경우 퀀텀을 취급하는 패밀리와 IBM·후지쯔를 취급하는 패밀리 등으로 구분되고 그 가운데서도 정품을 취급하는 패밀리와 그레이 제품을 취급하는 패밀리로 세분된다는 뜻이다.

전문점의 입지가 약화된 것도 패밀리화를 부추기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프린터 전문점이라고 하면 독점적 지위도 있고 판매가격도 저렴했지만 인터넷 쇼핑몰 등으로부터 저가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요즘은 전문점이라 해서 일반 소매점과 크게 다를 게 없다. 10만원대의 제품을 팔아도 5000∼1만원의 이윤을 챙기기 급급한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통업체끼리 상호 공생을 위한 짝짓기가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 프린터 전문업체는 보드 전문업체에 프린터를 좋은 가격에 공급하고 보드 유통업체는 프린터 유통업체에 보드를 좋은 가격에 공급하는 식이다.

나진상가에서 조립PC사업을 하는 P매장은 PC조립에 필요한 각 부품공급처 5개 업체와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정기적으로 미팅을 갖는 한편 한달에 한번 정도는 골프를 치며 결속을 다진다.

선인상가에서 CPU를 유통하는 한 상인은 『IMF 이후 궁합이 맞는 업체들끼리 그룹으로 뭉치는 사례가 급증했다』며 『적어도 도매에서만큼은 짜고 치지 않으면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통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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