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해야 할 동남아 반도체업체

「서쪽으로, 서쪽으로」

70년대까지만 해도 반도체 생산 거점은 미국이었으나 80년대에는 일본이, 90년대에는 한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2000년대에는 대만·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견해다.

현재 생산비용이 싼 지역을 찾는 미국과 유럽의 반도체업체들이 동남아 지역을 한국에 이은 새로운 생산 거점으로 육성하고 있다.

더욱이 한국 반도체업체들의 도약으로 위상이 약화된 일본업체들까지 가세한데다 동남아 각국 정부와 현지 업체들이 반도체산업을 전략산업으로 보고 있어 이 지역의 반도체 생산 거점화는 갈수록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반도체 생산에 관한 한 별다른 경쟁자 없이 지내온 한국업체들에 강력한 도전자가 등장한 셈이다.

◇현황=말레이시아 정부가 국영 반도체 수탁생산(파운더리)업체인 실테라에 올해안으로 5억5000만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웨이퍼 생산라인을 증설하겠다고 밝혔다. 또 국영기업인 퍼스트실리콘에 10억달러를 들여 처음으로 웨이퍼에 회로를 성형하는 전공정 공장을 사라와크주 쿠칭시 근교에 설립키로 했다.

태국 정부는 민관 합동으로(정부는 10∼28% 출자) 반도체 전공정 과정(웨이퍼의 회로입력) 공장을 건설하는 구상을 내놓았다. 중국 정부는 세계 반도체 생산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 10억달러를 들여 국영기업인 화홍사와 NEC 합작으로 D램 생산공장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대만 정부도 세계 최대의 파운더리 사업으로 다져놓은 반도체산업 기반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기 위해 올초 민관 합동으로 첨단 반도체 기술연구조직인 ASTRO를 구성,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정부뿐만이 아니다. 이 지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들과 현지 업체들도 대대적인 투자를 추진중이다. 인텔은 5억달러를 투자해 필리핀 공장의 펜티엄Ⅲ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있으며 사이프레스도 필리핀의 테스트 및 조립 생산라인을 증설중이다. TI는 필리핀을 디지털신호처리기(DSP)의 생산 거점으로 육성하고 있으며 암코테크놀로지도 관련 설비를 증설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NEC, 도시바, 히타치, 모토로라, 루슨트테크놀로지, AMD, 인텔 등 미국과 일본의 주요 반도체업체들이 생산 능력을 배가시킬 방침이다.

현지 기업의 투자가 활발한 대만의 TSMC, UMC와 싱가포르의 차터드사는 생산 능력을 두배 이상 확충하는 한편 인접 국가에 생산공장을 신설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국내 업체에 미칠 영향=지금까지 국내 업체들은 대만을 제외하곤 동남아 지역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력 생산품목인 D램을 생산하는 나라가 거의 없는데다 생산 수준도 0.35∼0.5미크론(1미크론은 100만분의 1m)정도로 뒤떨어져 그다지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제 사정은 달라지고 있다.

다국적 업체들의 기술이전이 활발한데다 현지 업체들도 합작을 통해 확보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지 반도체업체들은 자국뿐만 아니라 해외의 엔지니어들을 대거 끌어 들이고 있으며 한국의 엔지니어들은 스카우트 대상 1위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에 이어 중국과 말레이시아 등의 일부 국가에서는 일본 등 선진업체와 제휴해 한국업체의 아성인 D램 생산에 나서려는 업체들도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동남아 반도체업체들의 사업 확대 의지가 강력해지자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자못 긴장하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반도체 생산 거점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겨진 것은 저렴한 인건비 때문인데 한국보다 인건비가 낮은 동남아 지역이 몇년 뒤 한국처럼 성장하지 말란 법이 없지 않느냐』라고 반문하면서 『이제는 우리도 동남아 업체들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펴야 할 때가 됐다』라고 말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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