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민주주의...서현진 논설위원 jsuh@etnews.co.kr

선거일 아침이다. 이런 날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대의(代議)민주주의에 기초한 선거제도와 그 이념에 대해 생각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번 16대 총선에서는 초보 수준이긴 하지만 그동안 가능성으로만 여겨져 오던 인터넷 민주주의가 실전에 투입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인터넷을 통해 유권자들의 「알 권리」에 대한 정보가 공개돼 엄청난 파장을 불렀는가 하면 후보 자신들을 알리는 데도 이 문명의 이기는 톡톡히 역할을 해 냈다. 더욱 고무적인 일은 이번 선거 과정을 통해 비로소 인터넷의 위력과 투명성을 실감했다고 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들 가운데는 집이나 사무실에서 편안하게 투표하는 날도 멀지 않았다며 미래의 날들을 그려봤음직한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의 보급 규모가 주민등록증 발급수와 똑같아질 날이 시기적으로 멀지 않았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상정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인터넷 투표가 이뤄지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우선 유권자가 투표장에 갈 일이 없으니까 투표소가 필요없게 되고 선거일 역시 공휴일로 정해지는 일은 없을 터이다. 인터넷의 투명성은 선거운동을 더욱 공명하게 이끌며 후보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만천하에 드러내 줌으로써 유권자들로 하여금 현명한 선택을 도울 것이다. 개표시간이 광속 단위로 단축되는 것 역시 식은 죽 먹기가 될 판이다.

하지만 이런 상상은 매우 유치하다 못해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투개표 과정이 광속으로 처리된다면 정치인을 뽑는 선거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등을 뽑는 선거란 원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절차적 복잡성 때문에 생겨난 대의제도다. 인터넷은 수천만∼수억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의사결정 과정의 처리가 순식간이므로 최고통수권자가 시민을 직접 상대하면 되는 것이다. 이른바 참여민주주의 도래를 꿈꾸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2500년 전 그리스시대의 아테네 시민들은 아고라 광장에 모여 파피루스라는 두루말이에 알파벳이라는 의사전달 기호를 표기하는 방법으로 국사 결정에 직접 참여했다. 인터넷 민주주의에서는 아고라 광장이 인터넷 사이트가 되고 파피루스는 컴퓨터로 바뀌었다. 또 알파벳 기호는 디지털 기술로 대체되었다. 이런 가정은 종국적으로 인터넷 민주주의가 「작고 약한 것이 크고 강력한 것을 압도할 있다」는 민주주의 기본이념에 가장 가깝다고 보는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인터넷 투표가 현실화할 경우 시민이 국사 결정에 직접 참여한 그리스식 민주주의의 재현도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시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렇게 되면 대의민주주의에 기반한 오늘날의 서구 민주주의 제도는 엄청난 수정이 가해져야 할 것이다.

물론 다른 한편에서는 인터넷 민주주의가 인터넷과 정보기술을 맹신하고 있는 컴퓨터 마니아들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들의 주장은 우선 창과 방패의 관계처럼 인터넷에는 기술적으로 시스템 조작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에 민주주의 실현 가능성은 없으며 또 등장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그 골자다. 정치학자들 역시 최고 통수권자가 시민을 직접 상대하는 극단적 파퓰리즘 정치행태의 폐단을 들어 인터넷에 의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에 무게를 두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네트워크와 정보를 독점하는 소수 세력의 존재를 들어 인터넷 민주주의의 실체가 주권재민의 이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시각도 가세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인터넷 민주주의가 그리스식 민주주의 실현이나 파퓰리즘 정치의 폐단 여부를 떠나 어떤 형태로든 현실 선거제도를 변화시키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인터넷은 금세기 들어 모든 분야에서 패러다임 시프트의 에너지가 되고 있다. 그 위세나 여파로 보아 정치나 선거제도도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16대 총선은 훗날 그 정치적 의미와 상관없이 인터넷 민주주의 가능성을 십분 확인해 준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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