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용주의 영화읽기>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역」

「철도원」의 흥행에 힘입어 20여년 만에 빛을 보게 된 영화. 「역」은 선술집에 앉아 트로트를 틀어놓고 듣는 한 남자의 인생 이야기처럼 묘한 향수와 울림을 지닌다. 다소 빛이 바랜 듯한 이 영화의 힘은 삶의 치열함에서 한 발짝 벗어난 후, 느끼게 되는 인생의 허무와 쓸쓸함에 대한 자기 반성적인 동감이다. 「역」 이후, 같은 감독과 배우가 만나 20년 후에 만든 「철도원」이 인생의 종착역을 그려나갔다면 「역」은 인생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간이역처럼 치열한 삶의 한 귀퉁이를 담담하게 회고해 간다. 제목에서처럼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기차역은 과거의 삶을 청산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동시에 새로운 삶의 기대를 가능케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기차역이란 설정과 군데군데 묻어나는 80년대식 표현이 다소 촌스러운 센티멘털리즘을 강요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시대를 아우르는 삶의 관조와 고민의 흔적들을 유머스럽게 표출하고 있다. 감독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사적인 배경과 행동에 대한 구구절절한 변명을 배제하며 영화에 대한 싸구려 감상주의 역시 조심스럽게 차단을 한다.

올림픽 국가대표를 할 정도의 사격 솜씨를 지닌 형사 미카미는 아내 나오코와 이혼을 한다. 어린 아들에게 도시락을 사주면서 매정하게 돌아서는 그에게 아내는 미련이 남은 듯 계속 눈물을 흘리며 기차에 오른다. 살인 사건 현장에서 자동차를 검문하던 중 미카미의 동료가 범인의 총격에 살해되고 사격선수였던 미카미는 언론의 집중공세를 받는다.

세월이 흘러 미카미는 연쇄 살인사건의 수사 도중, 용의자의 여동생인 스즈코의 뒤를 쫓게 되고 기차역에서 용의자를 검거한다. 형사로서 또한 훌륭한 저격수로서의 그의 솜씨는 존경을 받지만 한 인질 현장에서 범인을 사살한 그의 뇌리에는 「백정 경찰」이라는 범인 어머니의 절규가 맴돈다. 명절을 쇠기 위해 집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던 중 미카미는 선술집에서 아름답고 귀여운 여인, 기리코를 만난다. 폭풍으로 배가 뜨지 않자 미카미는 신분을 숨긴 채 기리코와 데이트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집에서 돌아오는 자신을 마중 나온 기리코를 보며 미카미는 새로운 삶의 유혹을 느끼지만, 사직서를 내기 위해 기차에 오르기 전에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 미카미는 용의자가 10여년 전 자신의 동료를 살해한 동일범임을 알게 되고 또한 그가 우연히 마주친 기리코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해 낸다.

눈 덮인 삿포르의 역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만남과 헤어짐은 마치 명암이 교차하는 인생을 이야기하듯 잔인한 총격 장면과 대비를 이루며 서정적으로 그려진다.

<영화평론가 엄용주 yongjuu@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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