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단@2000>6회-창원공단의 발자취

지난 1973년 첫삽을 뜬 이래 창원공단의 역사는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역사와 동일선상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정부는 1962년부터 추진해온 경제개발 계획에도 불구하고 당시 주력이던 경공업 위주의 생산구조로는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절감하고 70년대들어서면서 중화학공업을 추진하는 쪽으로 정책의 가닥을 잡았다. 이에 따라 종합기계공업단지 건설계획이 수립됐고 이는 창원에서 현실화됐다.

창원이 기계공업단지로 선정된 요인은 몇가지가 있다. 우선 마산·진해는 물론 울산·부산·진주·포항·대구·구미 등 주변 도시와 가깝고 해운 항만시설을 축조해 바다로 진출하기가 용이하다.

또 500∼800m의 구릉에 둘러싸인 분지로 5000㏊의 평야지역이 있어 광활한 공장부지를 확보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지반이 견고해 중량물 공장을 건설하기에 알맞고 낙동강으로부터 취수가 가능해 막대하게 소요되는 공업용수와 생활용수를 확보할 수 있다.

창원공단 조성과 관련해 재미있는 에피소드로는 박 대통령의 애정을 들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창원에 아홉차례나 방문하면서 북한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분지」인 창원을 방위산업 육성의 적합처로 꼽았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이점을 등에 업고 73년 11월 공단 제1단지 건설에 들어간다. 이어 하구·적현·삼동·성주·차룡 등의 단지가 잇따라 건설됐다. 75년에는 부산포금이 밸브생산에 돌입했고 이어 창원공업·쌍용전기·진해전지 등이 가동을 시작, 61만2000달러의 수출을 기록했다. 창원단지가 수출의 첫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76년에는 금성사·남영금속·쌍용전기가 수출을 시작했고 77년에는 특히 삼성중공업·효성중공업·대우중공업·미원중기·부산제철·삼성중공업·현대양행 등이 기계류 수출을 개시했다.

이해를 기점으로 「기계류 수출 20억달러」의 대장정이 시작됐고 87년에는 10억달러, 마침내 92년에는 이 목표를 달성했다.

해마다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던 수출은 IMF를 겪으며 급전직하, 특히 이 지역 업체들의 구조조정이 이어지면서 공단 조성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57억달러의 수출을 기록하면서 이 지역 업체들은 창원 부흥이라는 꿈을 엮고 있다.

<허의원기자 ewh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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