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안산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반월·시화공단으로 빠지는 서안산 인터체인지에 접어들면 갑자기 차가 밀리기 시작한다.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이 갈라지는 삼거리부터 이곳까지 어림잡아 4㎞니까 정체구간은 5킬로미터쯤 되는 셈이다.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반대편 도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만큼 반월·시화공단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유동인구와 물동량이 많다는 것이다.
밀린 차들 사이에서 공회전을 하고 있는 트럭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색다른 점이 발견된다. 공단 입구니까 부품·원자재·완제품 등 공단에서 생산했거나 생산에 필요한 각종 물품이 실려있을 법한데 이보다는 오히려 생산장비와 건축기자재·폐기자재를 적재한 화물트럭들이 눈에 더 들어온다.
왜일까. 30분쯤 걸려 반월공단에 들어서면 그 까닭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공단 이곳 저곳이 파헤쳐져 있고 서너개 공장 건너마다 공장 증축·개축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 반월·시화공단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기 위한 홍역을 앓고 있는 것이다.
반월·시화공단은 사실상 자동차부품과 금속·기계 등 자동차 관련 부품 공단이다.
전체 가동업체 3160여개사 중 60% 정도인 2000여개 업체가 자동차 부품·소재 관련업체다.
전기전자업체는 전체의 12.1% 정도인 380여개사 정도다. 나머지는 석유화학·섬유의복업체가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자동차부품 관련업체 중심으로 단지가 형성되다보니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는 반월·시화공단에 치명타로 다가왔다. 기아자동차와 대우자동차가 경영난에 처하면서 이들 반월·시화공단 입주업체들은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가 하면 부도로 폐업을 하는 업체가 속출했다. 98년 한해동안 반월·시화공단에서 문을 닫은 업체만도 무려 293개사에 달했다는 것이 안산상공회의소의 집계다. IMF의 한복판이던 98년 중반께 이곳의 부도율은 2.01%로 치솟아 전국 평균 0.26%의 거의 10배에 달했다는 것. 지금은 자동차 수출과 내수 호조에 힘입어 부도업체 수는 큰 폭으로 줄었으나 부도율은 아직도 0.65%에 이르는 실정이다.
임도수 안산상공회의소 회장은 『기아사태·대우사태로 불렸던 자동차업계의 구조조정 바람이 한창 불어닥칠 당시, 이곳 반월·시화공단은 거의 기계소리 하나 들을 수 없는 적막 강산 그 자체였다』고 설명하면서 『다만 전기·전자업체와 섬유업체들이 원·달러 환율인상에 힘입어 나름대로 공장을 가동, 공단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전국 어느 공단보다 혹독한 IMF 한파를 겪었던 반월·시화공단은 최근들어 자동차·전기전자 경기가 되살아나면서 아연 활기를 띠고 있다. 85%대의 공장가동률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지난해 공장가동률은 65%였다. 1년 사이에 이곳 평균 공장가동률이 20%나 높아진 것이다.
기계가 돌고, 사람과 물건이 움직이자 반월·시화공단은 물론 인근 지역도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단지 주요 모퉁이마다 설치된 구인간판에 생산직 모집광고가 나붙기 시작했다. 반월공단 608-22 블록 모퉁이에서 라면 등 간식류를 파는 아주머니도 신바람이 났다. 올들어 매상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아주머니가 들려주는 말에서 이곳의 경기를 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98년의 경우에는 구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근무하는 친지나 친구·동료를 찾아와 구직정보를 귀동냥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으나 이제는 경쟁사에 근무하는 동료·친구를 자기 회사로 스카우트해오기 위한 만남의 장소로 변했다는 것이다.
대덕전자의 김희경 이사는 『3D업종의 업체는 이미 지난해부터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워 웬만한 중견기업도 생산직 근로자를 모집하기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생산직 인력난은 설비의 자동화·전산화로 그런대로 대체할 수 있으나 고급 두뇌 인력난은 정말 심각한 문제』라며 이곳에서 이동통신부품을 생산하는 A사의 한 관계자는 『1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부장급 연구팀장이 최근 사표를 내고 서울에서 벤처기업을 설립했다』면서 『이같은 고급 두뇌의 탈 안산·시화바람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라고 우려했다.
『인터넷과 코스닥 열풍으로 순식간에 떼돈을 번 「한국판 빌 게이츠」가 대거 탄생하면서 이곳 반월·시화공단의 고급 두뇌 엑소더스 현상은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고 임도수 안산상공회의소 회장은 설명하면서 자칫하다가는 반월·시화공단이 연구·기획능력이 전무한 단순생산기지로 전락한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전기·전자·자동차부품의 개발·생산에만 전념해온 전통 제조업 경영자들의 요즘 심사는 매우 불편하다. 생긴 지 몇년 안되는 인터넷 관련 벤처기업은 코스닥시장에서 초고공행진을 거듭하는데 비해 수십년의 사력을 지닌 이들 전통 제조업체의 주가는 액면가 수준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수출 1000만달러 탑을 수상한 D전자 사장은 볼이 잔뜩 부어 있다. 밤잠을 설치면서 전자부품을 생산, 일본·대만 등 경쟁업체를 제치고 해외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재래식 전자부품」업종으로 분류돼 주가가 곤두박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IMF 당시 수출이 국가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서 수출 제일주의를 외치던 정부 관료는 모두 어디가고 너도나도 벤처, 벤처만 외쳐대니 도대체 사업에 흥이 나지 않는다는 것. 인터넷·전자상거래도 결국 거래될 물건, 즉 전통 제조업이라는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현재는 매물 없는 복덕방식 인터넷 사이트와 인터넷 기업만 늘어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참다못한 이 사장은 최근 묘한 꾀를 냈다. 인터넷으로 사업다각화와 새로운 기업이미지통합(CI)작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요즘 잘 나가는 「텔」 「텍」이라는 단어와 회사의 영문 이니셜을 합성한 그럴듯한 사명으로 새단장하기로 했다.
이 회사처럼 요즘 반월·시화단지에는 새로운 CI작업을 하는 업체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특히 코스닥을 꿈꾸는 업체들은 너도 나도 작명소로 달려가고 있다. 이 바람에 반월·시화단지 인근의 문구점·페인트점·인테리어점들은 때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
건축·기계업체도 호황을 맞기는 마찬가지. IMF를 극복하지 못하고 도산한 업체의 공장을 인수한 업체들이 생산설비를 재구축하거나 아예 낡은 건물을 헐고 다시 짓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월·시화공단이 변하고 있다는 진면목이 감지된다. 최근 새로 입주하거나 사세확장 차원에서 제2·제3공장을 마련하는 업체들 대부분은 첨단 전자·정보통신 및 관련 부품업체들이다.
이처럼 전자·정보통신업체들이 이곳 반월·시화공단으로 대거 몰려들자 땅값도 크게 오르고 있다. 1년 전만 하더라도 평당 60만원에서 100만원 정도에 머물던 반월공단의 땅값은 현재 130만원을 호가하는데도 불구, 매물이 없을 정도다. 시화공단의 임대공장에 들어있는 한 인쇄회로기판(PCB)업체는 자체공장을 마련하기 위해 부도로 경매에 들어간 모 기계업체의 공장부지를 매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업체는 입찰 참여시기를 저울질하다 기회를 놓쳤다. 예전같으면 보통 3번 정도의 유찰이 이뤄진 다음 임자가 정해지는 것이 경매 물건의 특징인데 제1차 경매에서 낙찰자가 결정됐기 때문이다. 반월공단보다는 다소 여유가 있는 시화공단도 대략 70만∼80만원선에 거래되고 있다는 것이 업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최근 구 삼화왕관 자리에 다층인쇄회로기판(MLB)용 소재공장을 신축하고 있는 (주)두산의 김종철 상무는 『반월·시화공단은 수도권 인접 산업단지 중 물류기반을 비롯한 산업인프라가 가장 잘 갖춰진 곳이며 양질의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면서 『특히 서해안 고속도로와 구리·안산 고속도로, 평택항 등은 반월·시화단지가 앞으로 전개될 서해안시대를 이끌 중추적인 산업단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그의 말대로 반월·시화공단은 이제 자동차·기계 중심의 전통 제조업단지에서 정보통신·컴퓨터·전자부품·메카트로닉스가 한데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21세기형 복합 하이테크산업단지로 거듭 태어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때쯤이면 바다오염의 상징처럼 치부되는 시화호는 유람선이 떠다니고 낚시꾼이 몰려드는 국내 최대 담수호 휴양지로 탈바꿈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희영기자 hy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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