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硏 통폐합
민간 업계의 독자적인 신기술 개발이 요원하던 60∼80년대 이공계 출연연구소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70년대 이후 전자·반도체·통신 분야 신기술 개발은 대부분 출연연구기관의 몫이었다.
수출대체 또는 수출전략 품목 관련 특정연구과제는 말할 것도 없었다. 80년대 초반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64k D램이나 시분할 전 전자 교환기(TDX1)의 개발, 교육용 컴퓨터 국산화 등의 프로젝트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빛을 본 것들이었다.
19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구 KIST)를 필두로 하나둘씩 출범하기 시작한 출연연구기관은 정부의 기초과학 또는 기반기술 확보라는 정책적 배려에 힘입어 3공화국 말기인 1979년 경에는 15개소로 증가했다. 이들 15개 연구소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내세운 「사회전반의 개혁」이라는 명분에 따라 9개소로 통폐합된 것은 1980년 12월이었다.
통폐합의 근거는 1980년 10월 과학기술처가 마련한 「이공계 출연연구기관 기능 재조정」이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당시의 연구기관 통폐합 과정에는 나름대로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었다. 우선 연구기관들은 각 기관별 기능수행의 특성에 따라 국책연구기관과 산업기술연구기관 그리고 기초연구교육기관 등 3개의 범주로 분류됐다.
3개의 범주 가운데 국책연구기관은 국책사업에 대한 정책 개발분야의 응용연구 및 기술개발을 담당하는 곳으로서 원자력연구소와 표준연구소 등이 해당됐다. 기초연구교육기관은 고급과학기술인력 양성을 비롯해서 중장기 국책연구개발과 기초 응용연구를 수행케 하는 곳으로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한국과학원(KAIS) 등이 속했다. 또 화학연구소와 기계연구소 등이 속한 산업기술연구기관은 산업계에 대한 기술지원과 지도, 선진기술의 조사, 위탁기술을 개발하는 곳을 의미했다.
구체적인 통합원칙으로는 연구기관 단위를 능률적인 관리와 운영이 가능한 적정 규모로 통합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각 기관이 담당할 기능과 분야의 유사성을 감안하여 인적 규모는 연구직과 기술직을 포함해서 500명 안팎으로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자력과 표준 등 국책사업에 대한 정책개발분야 범주에서 몇 개 연구소, 전자와 화학 등 산업기술연구 범주에서 몇 개 연구소 하는 식으로 통폐합 대상 또는 살아남을 연구소들이 결정되고 말았다.
이런 결정에 따라 1981년 1월부로 새 출범한 9개 연구소는 KAIST(KIST+KAIS), 한국에너지연구소(한국원자력연구소+한국핵연료공단), 한국동력자원연구소(자원개발연구소+종합에너지연구소), 한국표준연구소, 한국기계연구소(한국선박연구소+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한국인삼연초연구소(한국연초연구소+고려인삼연구소), 한국전기통신연구소(한국통신기술연구소+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 한국전기기술연구소 등이었다.
새로 출범한 연구소의 소속부처도 기존에 과기처, 상공부, 체신부, 동력자원부, 공업진흥청, 전매청 등으로 나누어져 있던 것을 과기처로 단일화했다.
그런데 문제는 구 KIST와 KAIS가 통합된 KAIST(현재의 KAIST와는 다름, KAIST는 1989년 6월 현재의 KIST와 학사기능의 KAIST로 다시 분리됐음)였다. 새로 출범한 9개 기관 중 8개는 나름대로 통폐합의 명분이 있었지만 KAIST는 사정이 달랐다. 구 KIST는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정책 초기단계부터 종합연구를 수행해 왔고, 1973년 설립된 KAIS는 석사급 이상 이공계 고급 과학기술 인력양성에 주력해 왔다.
KAIST의 출범은 이를테면 연구기능과 교육기능이 병존하는 조직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기능의 유사성에 따라 출연연구기관을 통폐합한다는 과기처의 원칙에도 맞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KAIST는 80년대 내내 연구기능과 교육기능의 융화 및 연계가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곤 했다.
구 KIST가 KAIST로 바뀐 것은 조직의 기능이나 역할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출연연구기관과 마찬가지로 구 KIST 역시 통폐합을 앞둔 1980년 8월 22일 천병두(1986년 작고) 소장 이하 부소장급 이상 간부들이 「구시대 인물」로 낙인찍혀 모두 옷을 벗었다. 초대 KIST 원장과 제2대 과기처장관 그리고 통폐합 당시의 KAIS 원장이던 최형섭도 옷을 벗었다.
당시만 해도 KIST나 KAIS에서 최형섭에 대한 예우는 최고의 것이었다. KIST에서는 최형섭의 과학자로서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79년 1월 소장 직속으로 최형섭 연구실이라는 조직을 신설하기도 했다. 과학자로서는 그만한 영예가 따로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최형섭은 8월 22일 이후 KIST 구내 출입 자체를 봉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구 KIST와 KAIS의 집행부가 옷을 벗던 날 두 기관을 동시에 접수한 사람은 육사출신(13기)의 KAIS 교수 이정오였다.
이정오는 이날 제5대 구 KIST 소장 및 제6대 KAIS 원장에 겸직 발령을 받았다. 이정오는 이어서 한달 후 제5대 과기처장관으로 입각했다. 1985년까지 장관직에 있으면서 이정오는 한국과학재단 이사장도 겸임했다.
9개 연구소 가운데 통폐합 규모가 가장 컸던 곳은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와 통합한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였다. KETRI는 1976년 구 KIST 부설 전자통신연구소에서 분리돼 출범한 통신기술 전문 연구소였다.
1976년 12월 당시 KTRI와 함께 구 KIST 부설 전자통신연구소에서 분리돼 출범했던 또 다른 연구소가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이다. KIET는 1980년 통폐합 당시 화학연구소, 표준연구소와 함께 조직이나 규모 면에서 거의 원상태를 유지한 채 과기처 소속으로 새 출범하는 과정을 거쳤다.
KIST가 기초연구와 고급인력양성기관으로 역할이 수정되면서 KETRI와 KIET는 자연스럽게 우리 나라 전자정보통신 분야 신기술 개발을 책임지는 중추 연구기관으로 급부상했다. 세계적으로도 통신기기와 반도체 그리고 컴퓨터의 역할이 증대되던 시기였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컴퓨터와 통신의 통합이 급진전되면서 「컴퓨터&커뮤니케이션(C&C)」이라는 신 개념이 부상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통신부문과 전자부문의 기술 개발이 각각 KETRI와 KIET로 양분돼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상호 기술통합이나 지원체계는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KETRI의 전신 KTRI와 KIET의 통합은 이미 1977년 말부터 상공부에 의해 논의돼온 것이긴 했다. 상공부는 당시 산하기관이었던 KIET를 중심으로 체신부 산하의 KTRI와 동력자원부 산하의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를 통합하자는 안을 냈다. 물론 이 안은 70년대 중반부터 전자정보통신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던 과기처와 체신부의 반대에 부닥쳐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상공부 안은 1980년 11월 국보위에 의해 일부 받아들여져 KETRI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통합 과정에서 KIET가 제외된 것은 국보위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KIET는 원래 1976년 출범당시 정부 예산이 빈약해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차관을 들여와 구미공단내에 설립된 준 외자 출연연구소였다. 통합이 무산된 것은 IBRD 측이 완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에 굴복할 국보위가 아니었다. 국보위는 KETRI와 KIET의 소장 및 감사를 겸임시킴으로써 행정적 차원의 통합을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출연연구소 운영개선 방안」이라는 것을 만들어 컴퓨터, 반도체, 통신, 전기부문 출연연구소의 소속을 모두 과기처로 단일화 해버렸다.
두 연구소의 행정 통합체제는 겸임소장이던 최순달(전 과기처장관)이 1982년 사임하면서 쉽게 끝이 나는 듯했다. 더욱이 KETRI와 KIET가 과기처 기획관리실장 출신의 백영학(전 국립과학관장)과 국방과학연구소 전자통신사업단장이던 김정덕(한국과학재단사무총장)을 각각 소장으로 영입하면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두 연구소가 다시 통합 절차를 밟게 된 것은 KIET가 1984년 초 정기이사회에서 구미공단내 6만평의 연구시설과 부지를 매각하고 다른 지역에 안정된 연구시설을 확보할 것을 결의하면서부터였다.
이 결의에 따라 KIET는 구미공단내 시설과 부지를 금성반도체에 매각하고 KETRI 옆의 5만여평을 사들여 대덕단지로 이전했다. 굳이 KETRI 인근 부지를 사들인 것은 두 연구소의 통합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었다.
이런 움직임들이 결실을 맺어 두 연구소의 통합은 1984년 8월부터 과기처에 의해 본격 검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12월 29일에 열렸던 제48차 경제장관회의에서 두 연구소의 통합이 의결됐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구 ETRI)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다음주 목요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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