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34);제 3부 국산화와 수출의 시대 (10)

전자교환기

 1976년 봄 한국무역협회는 미국의 컨설팅회사인 ADL(Arthur D Little)에 의뢰하여 「우리나라 전자공업의 장기전망」이라는 조사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유망산업 품목으로 컬러TV, VTR, 컴퓨터 및 주변기기 그리고 전자교환기 등 모두 24개 분야를 제시했다.

 이 가운데 국가적으로 가장 많은 관심이 집중됐던 분야는 역시 컬러TV였다. 1978년까지 금성사·삼성전자·대한전선 등 이른바 가전 3사는 컬러TV방송에 대비하여 모든 생산체제를 갖추었고 브라운관을 비롯한 관련 부품업계도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호에서 언급했던 대로 컬러TV방송의 정책적인 지연으로 관련업계는 혼선을 빚으며 새 공화국이 들어서는 1980년까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컬러TV에 이어 두번째로 국민적 관심사가 된 것이 전자교환기였다. 1976년 7월 통신정책 주무부처인 체신부는 제4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기간(1977∼1981년)에 100가구당 3.4대(1975년 기준)이던 전화보급대수를 6.5대로 늘리기로 하는 제4차 통신사업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나아가서 제5차 계획이 끝나는 1986년까지 16대로 끌어올린다는 장기 계획도 공개했다.

 전화보급대수를 늘리는 최대 관건이 바로 교환시설의 현대화, 즉 전자교환기(ESS:Electronic Switching System)의 도입이었다. 기존의 EMD 또는 스트로저 방식과 같은 기계식교환기로는 전화가입자회선을 늘리는데 한계가 있었다. 여러 정책기관들은 1984년 이후 기계식교환기의 단종이 예상됨에 따라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전자교환기를 도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정부 측에 건의하고 나섰다. 결국 정부는 1972년 경제장관회의에서 결정된 1976년 이후의 기계식교환기 추가 도입건을 무효화시키고 우리 실정에 맞는 전자교환기로 다시 선정키로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전자교환기의 국내 개발을 위한 연구검토도 이뤄지고 있었다. 1974년 5월 체신부는 전자교환방식공동추진계획을 수립하여 산하연구기관인 한국전기통신연구소(1969년 발족한 기관으로서 1981년 출범한 동명의 연구소와는 다르다) 내에 동양정밀과 금성통신 등 업계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전자교환연구부라는 조직을 만들어 전자교환기 개발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타진하고 나섰다.

 연구결과는 곧 건의서 형식으로 체신부에 보고됐다. 주요 내용은 선진국에서 현재 실용화단계에 있거나 테스트 중인 전자교환기방식 가운데 개발이 쉽고 기존 기종과의 정합(整合)이 용이한 기종을 선택해서 국산화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기존 동양정밀이나 금성통신 등 기계식교환기를 조립해오던 업체들의 생산시설과 기술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도 조건의 하나로 포함됐다. 체신부는 이 건의서를 토대로 1976년부터 전자교환기 국산화에 나서는 한편 1977년에는 개발 및 도입대상 교환기 방식을 최종 결정키로 했다. 또 교환기 생산을 전담할 공기업을 설립하여 1978년 중 시제품을 내놓고 1980년부터 양산체제에 돌입한다는 중장기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 계획은 1975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의 부처 연두순시 때 장승태(張承台) 체신부 장관에 의해 보고됐다.

 기술자립에 강한 집념을 갖고 있던 박 대통령은 그러나 이 계획을 거부하고 국내 기술진을 총동원해서라도 독자기술로 독자적인 교환기를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1년 후인 1976년 2월 경제장관간담회의에서는 시분할방식(TDM) 전자교환기를 국내에서 직접 개발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또 국산 기종이 보급되기까지의 과도기에 외산 전자교환기를 도입키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측에 방식 및 기종 입찰 관련 실무를 맡기기로 합의했다.

 이즈음 세계 전자교환기 기술개발 현황을 보면 1965년 미국의 벨연구소가 처음으로 「No1 ESS」라는 교환기를 상용한 이후 일본은 1970년, 서독은 1972년 말에 각각 실용화에 성공하고 있었다. 전자교환기의 방식은 크게 공간분할 반전자식(SDM)과 TDM 등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SDM교환기는 통화부분은 기존의 기계식 교환기의 핵심부품인 리드 릴레이 등으로 구성하고 제어부문만 전자식으로 대체한 반면 TDM교환기는 통화와 제어부문 모두가 전자화된 것이었다. TDM은 SDM에 비해 통화로 구성 등 물리적인 측면에서 융통성이 많았고 구성 가격도 매우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당시 일본과 서독이 상용화단계에 이른 것 역시 TDM교환기였다. 그러나 TDM은 독자적인 기술개발이 어렵고 개발비용도 많이 들 뿐 아니라 기술자체가 신 개념이라서 개발 결과를 쉽게 낙관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1976년 3월 KIST는 정부의 위임아래 전자교환기 도입을 위한 국제입찰을 실시했다. 1959년 기계식교환기 입찰이래 사상 두번째의 국제입찰이었다. 이 입찰은 향후 한국이 개발할 전자교환기 기종 방식을 결정짓게 한다는 점에서 국내외 업계로서는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은 입찰결과가 어떻든 한국정부의 재량에 따르되 향후 5년간의 국내 생산단가를 제시하고 KIST가 지정하는 기관에 기술을 이양할 것 등의 입찰 참여조건이 붙여졌다. 입찰에는 미국의 ITT, GTE, 일본의 일본전기(NEC),후지통신(富士通信), 서독의 지멘스 등 모두 5개 기업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GTE는 삼성, 후지통신은 대한전선과 각각 합작 또는 기술이양조건을 내세워 정부의 환심을 사는 등 경쟁우위를 노렸고 ITT·NEC·지멘스 역시 한국정부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낙찰에 유리한 관건의 하나인 회선당 입찰가격에서 NEC는 170달러, 후지통신이 190달러, 지멘스가 440달러, ITT가 450달러, 그리고 GTE가 550달러를 각각 써냈다. 가격으로만 볼 때는 당연히 NEC기종을 택해야 했지만 국제무역관행과 기술수준을 포함한 여러가지 전후관계를 따져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다. 이해당사자나 기관 그리고 부처에서 논란이 거듭됐다. 이런 와중에서 경제기획원이 낙찰기준에 대한 연구조사를 국제입찰 실무를 담당했던 KIST에 부여함으로써 일은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교환방식은 기존시설을 적극 활용하고 기술적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인다는 차원에서 SDM으로 결정을 보았다. 또 기종은 단일공급업체의 것으로 하되 도입물량은 1980∼1984년을 기준으로 200만 회선이었다. 본체조립생산을 전담할 공기업을 설립하며 이 회사에 기존 11개 국내 관련업체를 참여시키고 부품생산은 완전 계열화한다는 내용도 채택됐다. 나중에 국내 독자개발을 위한 연구기관으로는 우선 KIST부설로 발족시킨 뒤 체신부 산하기관으로 확대 발전시킨다는 세부 방침이 세워졌다.

 이 방침에 따라 우선 1976년 12월 31일 KIST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KCRI)가 세워지고 KIST 부소장이던 정만영(鄭萬永)이 초대 소장으로 선임됐다. 1977년 2월에는 도입 전자교환기의 국내 조립생산을 담당할 한국전자통신주식회사(KTC)가 설립됐고 초대 사장에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이던 이만영(李晩榮)이 취임했다.

 산업은행이 150억원의 자본금 전액을 출자한 한국전자통신은 곧바로 연간 66만회선을 조립할 수 있는 생산라인을 구미전자공업단지에 착공했다. 이 규모는 당시 동양 최대였다. 구미공장은 1979년 3월에 완공됐고 여기에 소요되는 반도체, 하이브리드IC, 플라스틱 부품, 커넥터 등 관련부품 개발공급업체로 광림전자 등이 지정됐다.

 만반의 준비가 갖춰지자 정부는 다시 체신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경제기획원 차관 등이 참여하는 전자통신개발추진위원회를 대통령령으로 설치했다. 위원회는 여러 가지 상황변화를 이유로 들어 국제입찰에 응찰했던 5개사에 수정입찰을 제시하고 여기에 응한 NEC, 후지통신, ITT 등 3사 가운데 ITT를 최종 공급자로 선정했다. 도입할 기종으로는 「메타콘타10CN(M10CN)」이 결정됐다. ITT는 수정 입찰과정에서 벨기에의 BTM사를 끌어 들여 공동 응찰했는데 결과적으로 최종 낙찰자 명의는 ITT/BTM이 됐다.

 도입계약은 1977년 12월 10일 전자통신개발추진위원회와 ITT/BTM, 그리고 ITT의 자재납품계열사인 ITTI등 3자간에 총괄계약 형식으로 이뤄졌다. 같은 날 한국전자통신과 ITT/BTM간의 M10CN 생산을 위한 기술도입계약도 맺어졌다.

 계약 직후 한국전자통신은 소속 연구원 100여명을 벨기에 BTM본사에 파견하여 최신 전자교환기 기술을 습득케 했다. BTM 역시 한국에 연인원 35명의 기술진을 파견, 한국전자통신 측 연구원을 지도했다. 이 와중에서 ITT/BTM은 1978년 6월 계약 물량 가운데 1차분 2만회선을 벨기에로부터 직접 들여와 서울 영동전화국과 당산전화국에 각각 1만회선씩 설치했다. 이로써 비록 외산에 의존한 것이긴 했지만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전자교환기 시대가 열리게 됐다.한편 KIST부설 외곽연구 조직으로 발족됐던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1977년 12월 31일부로 소속이 체신부로 바뀌면서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로 거듭났다. 이로써 국산전자교환기 개발을 위한 준비는 모두 마쳐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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