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기획-뉴스&밀레니엄> 커버스토리.. 부끄러운 "한국의 슈퍼컴"

 지난 96년부터 미국 에너지부가 주관하고 있는 대형 민관합동 장기 국책프로젝트 「ASCI(Accelerated Strategic Computing Initiative)」. 샌디아·로스앨라모스·로렌스리버모어 등 3개 국립연구소가 인텔·SGI·IBM 등 컴퓨터업체와 각각의 팀을 이룬 이 프로젝트의 핵심과제는 세계 최고 성능의 슈퍼컴퓨터를 개발하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개발성과는 샌디아국립연구소·인텔팀의 「ASCI 레드」 프로젝트가 2.12 테라플롭스(TeraFLOPS)까지, 로스앨라모스연구소·SGI팀의 「ASCI 블루마운틴」과 로렌스리버모어연구소·IBM의 「ASCI 블루퍼시픽」 프로젝트가 각각 3테라플롭스 수준까지 올라와 있다. 98년 현재의 상용 슈퍼컴퓨터 평균 처리속도가 58.6 기가플롭스(GigaFLOPS)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50배나 빠른 셈이다.

 하지만 「ASCI」 프로젝트의 목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정부는 매년 4억∼5억달러씩을 투입, 오는 2004년까지 100 테라플롭스급 슈퍼컴퓨터를 완성할 계획이다.

 미국정부가 이처럼 거액의 예산을 쏟아부어 개발하려는 슈퍼컴퓨터의 용도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핵무기 모의실험용이다. 여기에는 핵 주도권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세계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 숨어있다. 미국정부 슈퍼컴퓨터 전략의 일단은 슈퍼컴의 성능이 곧 핵이고 핵은 곧 국가경쟁력(패권)이라는 등식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역시 NEC·히타치·후지쯔 등 3대 개발업체들을 중심으로 최고 성능의 슈퍼컴퓨터 개발에서는 미국에 밀리지 않겠다는 태세다. 이에 앞서 NEC는 2002년까지 30∼100 테라플롭스급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독일이나 영국 등 유럽국가들은 자체 개발은 하지 않지만 슈퍼컴퓨터 보유대수를 늘려 나가고 있다.

 슈퍼컴퓨터는 전략핵개발 등 군사목적과 기초·응용과학 연구 등 학술용 외에도 그 활용범위는 사실상 끝이 없다. 폭우나 폭풍·지진 등 자연재해의 조기예측은 물론 천체의 운동, 인체의 신비 등 자연의 물리적 현상을 규명하기 위한 고도의 과학계산을 위해서는 슈퍼컴퓨터가 필수적이다. 민간기업에서 데이터마이닝·데이터웨어하우스 등 대용량 데이터의 실시간 처리나 정밀한 제품설계 등 범용 목적으로 슈퍼컴퓨터를 도입하는 사례도 급증하는 추세다. 자동차의 공기역학 설계와 충돌시험, 신소재와 신약의 개발, 자원탐사 등 산업기술 개발은 물론 영화제작에 이르기까지 슈퍼컴퓨터는 없어서는 안될 핵심도구로 부상했다. 한때 PC와 테크니컬워크스테이션의 성능향상이 급진전을 보이면서 나타났던 슈퍼컴퓨터 무용론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나아가서는 90년대를 전후해 정보사회가 정착된 후 슈퍼컴퓨터는 국가경쟁력의 척도가 되고 있고 있다. 현재 각국이 보유하고 있는 슈퍼컴퓨터의 현황을 보면 위의 정의는 좀 더 분명해진다.

 광범위하고 객관적으로 각국 슈퍼컴퓨터 보유현황을 파악하는 데 널리 사용되고 있는 「Top 500」 리스트에 따르면 현재 성능순위에서 세계 500위 안에 들어 있는 슈퍼컴퓨터 가운데 300대를 미국이 보유하고 있다. 뒤를 이어 일본(56대), 독일(47대), 영국(29대), 프랑스(18대) 등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실상 선진국 서열과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6월 발표된 각국의 슈퍼컴퓨터 성능서열 자료인 「Top 500」 리스트에 총 3대가 올라가 있다. 올해 6월 이후 가동한 기상청과 전북대학교의 슈퍼컴퓨터가 빠져 있어 이를 포함하면 세계 500위권에 드는 명실상부한 슈퍼컴퓨터는 총 5대다. 물론 「Top 500」 리스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미니급 슈퍼컴퓨터까지 포함하면 총 15대로 외형적으로는 적지 않은 숫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슈퍼컴퓨터의 보유수준을 크게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대수가 아니라 실제 활용 측면에서 국가경쟁력 향상에 직결될 수 있는 공공목적의 고성능 슈퍼컴퓨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15대 가운데 보유기관이나 업체가 전용으로 사용하는 슈퍼컴퓨터가 9대, 공용으로 활용되는 것이 6대다. 공용 슈퍼컴퓨터도 5대가 대학에 설치, 학술연구에 초점을 두고 있고 그나마 성능이 미니급 수준인 것이 대부분이다. 결국 일반에 개방된 공용은 최근 관할권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연구개발정보센터(KORDIC)로 넘어간 「크레이 C90」 한대뿐인 셈이다. 하지만 이마저 수령이 6년이 넘은 것으로 사실상 폐기 직전의 낡은 기종이다.

 슈퍼컴퓨터가 국가경쟁력의 원천인 기초·응용과학 연구와 산업기술 개발에 파급효과가 지대한 국가 인프라라는 사실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다. 슈퍼컴퓨터의 도입확대와 공동자원으로서 기존 슈퍼컴퓨터센터들의 활용방안, 그리고 이에 따른 국가적인 지원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김상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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