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벤처기업 (178)

 혜련씨, 어느덧 올해도 지나가는군요. 올해에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부대 통신반에서 개발한 무선통신 프로그램이었고, 가장 행복한 일은 당신을 만난 일입니다. 그 두 가지 일을 돌이켜 보면 나는 행복한 사나이임에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보람찬 새해를 맞으십시오.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어디다 비느냐고요? 글쎄, 요새 나가고 있는 교회의 하나님에게 빌까요? 그런데 마음속으로 신앙심이 생기지 않아 고역입니다. 앞으로는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만.

 12월 25일    

 미시간 호변에서 최영준으로부터

 여기 새해 첫 날에 폭설이 쏟아졌습니다. 눈이 사람의 키를 덮을 만큼 내렸다면 과장된 말일까요? 전부 그렇게 많이 쌓인 것은 아닌데, 눈이 바람에 쓸려 고랑이나 담 옆은 그 정도입니다. 거리의 교통은 마비되고, 제설차가 분주하게 다니지만, 모든 교통을 뚫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상가와 집 사이에는 눈을 뚫은 터널이 생겼습니다. 교통이 완전히 막힌 곳은 헬기로 일용품을 공수해 주고 있어요. 하룻밤 사이에 미시간호가 꽁꽁 얼어붙고, 하늘과 땅이 온통 눈으로 가득 차 있어요. 상상이 됩니까? 신난다고요? 물론, 남의 이야기이니까 그림이 멋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직접 당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난감하지 않답니다. 나는 이런 폭설은 난생 처음 봅니다.

 나는 오늘 정오 무렵에 같은 연구소 연구원인 고린도와 함께 호변에 쌓인 눈에 터널을 뚫고 에스키모 집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눈에 쌓인 그 안은 그렇게 안온하고 조용했습니다. 지금의 에스키모들은 보일러식 양옥을 지어서 산다고 하지만, 옛날 에스키모들이 얼음집을 짓고 산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뚫고 지은 눈집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린도가 여자 친구와 함께 와서는 나 보고 자리를 비워 달라고 하더니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와 고린도 사이가 그렇게 친한 것으로 알고 있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 젊은이들은 집에 초대할 때 응하거나, 데이트에 응하면 보통 그런 것을 포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한국인이고 그런 상식을 싫어하니 믿으소서. 생활 환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오랜 관습은 무시할 수 없으며,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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