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스엔지니어링(RE : Reverse Engineering). 기존 프로그램을 거꾸로 분석해 설계 아이디어와 노하우를 추출, 기술향상과 또다른 창조를 추구하는 고도의 프로그램 행위다. RE의 허용은 세계적으로 명문화되는 추세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합법적 행위로 간주되지 못한다.
국내에서도 RE를 허용하자는 의견이 정보기술분야를 중심으로 다시 대두되고 있다. 「통상압력」설 또는 「시기상조」론에 밀려 논의가 중단된 지 4년 만의 일이다. 미국과 EU가 이미 RE를 허용하고 있으며 부정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산업적 측면에서 플러스효과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 그 배경이다. RE는 특히 단순모방일 경우 불법복제 또는 재산권 침탈의 소지가 있긴 하지만, 선진 기술교류와 제품경쟁력 제고 차원에 활용될 경우 반드시 필요한 일종의 기술교류 기법이다.
정부 차원에서 RE 허용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은 지난 95년 제4차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 개정때. 당시 정부는 소프트웨어(SW) 등 첨단 기술수준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제4차 개정에서 RE 허용을 명문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같은 해 12월 30일 공포된 개정법에서는 RE조항이 제외되고 말았다. 98년 12월 30일 공포된 제5차 개정과정에서는 아예 논의 자체도 없었다.
통상압력설과 시기상조론이 대두된 것은 제4차 개정을 위한 공청회 때부터였다. 먼저 통상압력설은 이날 방청객 자격으로 참석했던 미국대사관 소속 상무관의 공개발언이 그 진원지였다. 이날 상무관은 『한국에서 RE 허용 명문화는 저작권자 보호조항에 위반되며 우호적인 한·미관계에 마찰의 소지가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 발언은 일파만파로 국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 당시 공청회때 패널 토론자로 참가했던 전석진 변호사는 『명문화에 대한 (국내 인사들의) 반대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삽입하는 쪽으로 가는 분위기였다』며 미국측의 통상압력설에 무게를 실었다. 역시 토론자로 참여했던 천유식 박사도 『미국의 반대만 없었다면 무난히 허용됐을 것』이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당시 정보통신부 정보통신진흥과장으로서 법개정 실무를 담당했던 이재홍 서기관(초고속망구축과장)은 『미국의 반대도 있긴 했지만 명문화에 대한 (국내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지원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다소 다른 입장을 보였다. 그는 『명문화가 무산된 것은 부정적 측면이 강조된 나머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다만 『정부 차원에서 RE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를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양측의 의견은 약간 다르지만 한가지 분명해진 것은 통상압력설이든 시기상조론이든 어느것 하나도 이제는 RE 허용여부에 대한 논의 재개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미국과 EU 등이 다양한 안전장치(호환성 확보 목적, 공정이용 목적 등) 아래 RE 허용을 명문화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허용논리에 큰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98년 명문화 이전부터 법원판례를 통해 RE를 허용해 왔으면서도 한국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모순을 자초하고 있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 『RE 허용은 이제 순기능에 주목해서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RE의 미학은 개발행위(복제)가 아니라 연구행위(창조)에 있다는 것. 이를테면 분석을 통해 재창조의 추진력을 얻고자 하는 데 그 핵심사상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세계적으로도 RE는 기술발전의 원동력, 즉 기술적 행위로 간주돼오고 있다. 지나친 저작권의 적용은 오히려 산업간 경쟁을 제한하고 기술의 발전을 막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논리는 그래서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내에서도 신제품 개발시 또는 호환성 있는 부가SW 개발시 경쟁제품을 연구분석하는 것은 이미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범법자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현재 RE 허용에 반대표를 던지는 쪽은 공교롭게도 대다수 미국계 다국적기업과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국내 유명 SW회사 관계자들. 한마디로 시장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는 기업들이다. 미국정부의 대한 압력도 여기서 힘을 얻고 있다. 반면 찬성표는 다수의 국내 기업 관계자들에게서 쏟아지고 있다. 신생 기업들이 새로운 기술과 경험에 목말라 하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RE가 허용된다면 기술적으로 그 가능성과 범위는 어느 정도나 될까. 한 SW회사 개발책임자는 『지금처럼 거대한 규모의 SW를 리버스엔지니어링해 유사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며 『실제 RE가 적용되는 것은 파일 포맷이나 인터페이스(API)를 분석해 애드온(Add on)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부가적이고 첨가적인 응용이 일반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편 정통부는 올 가을 정기국회에 제6차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 개정안을 제출한다는 방침 아래 관련작업을 진행중이다. 이를 놓칠세라 RE 허용론자들은 이번 기회에 개정 기초작업부터 허용여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다.
<김상범기자 sb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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