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들어 국산 가전제품의 주력시장으로 급부상했던 독립국가연합(CIS)이 지난해 8월 러시아 외채지불유예(모라토리엄)의 여파가 장기화하면서 국내 가전업체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최근들어 카자흐스탄 정부가 환율통제를 포기하고 중심국가인 러시아가 정치적 혼란에 휩싸이면서 국내 가전업체들은 수출확대는커녕 수출을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당초 국내 가전업계는 러시아가 올 1·4분기 중 경기가 활성화될 기미가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 시장에 큰 기대를 걸어왔다.
지난달 16일 세계은행(IBRD)이 러시아에 대한 23억달러 지원의사를 표명하는 호재로 말미암아 1달러당 10루블 이하였던 루블화가 반등, 20∼22루블로 상향 안정화되는 추세였다. 이같은 환율안정세에 힘입어 러시아내 신용경색이 다소 풀리고 물가도 내려가면서 가전제품에 대한 수요회복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내 가전업체들은 러시아의 통화가치 안정에 따른 수출증대 및 수익회복을 기대하고 수출주문량 확보에 나서기 위한 준비작업을 마쳤던 것.
그러나 러시아가 지난 1일부터 10일간의 휴일에 들어가는 바람에 신규 주문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휴일 이후로는 러시아 의회의 보리스 옐친에 대한 탄핵소추 공방 및 세르게이 스테파신 신임 총리후보에 대한 하원인준이 불투명해지면서 또 다시 극도의 혼란이 시작, 국내 가전업체들의 CIS지역에 대한 수출회복 및 수요진작 전략을 수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국내 가전업체들은 CIS에 대한 기존 선적량과 재고물량을 완전 소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업체들은 CIS의 가전제품 가격이 전반적으로 작년대비 20% 하락한데다 판매량마저 20∼30% 떨어지는 등 CIS시장이 수익성과 물량면에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에 따라 신규 수출을 줄인 채 러시아의 정세변화를 관망하고 있다.
실제 삼성전자는 최소 물량만을 선적하고 있다. TV의 경우 올 1·4분기 중 6만여대를 선적했는데 이는 작년 1개월치 물량에 불과하다. VCR도 별다른 물량증대없이 월 1만7000∼2만여대를 출하하는 데 그치고 있다.
LG전자도 당초 올 4∼6월 CIS에 대한 수출량 증대 등 위험을 감내하는 경영을 적극 검토하다가 다시 관망세로 돌아섰다.
TV는 월 3만∼4만대, VCR는 월 3만대를 선적하는 데 그치는 등 지난해에 비해 무려 30∼40%가 줄어든 상태다.
CIS는 양사의 가전제품 전체 수출량의 약 12∼20%를 차지하는 시장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TV 본사 출고기준으로 전체 수출의 30%나 된다. 쉽사리 손을 뗄 수 없는 중요시장인 것이다.
그러나 CIS가 고수익 시장에서 저수익 시장으로 변한데다 정세변화 등으로 시장부활 예측이 힘든 나머지 국내 가전업체들의 어려움이 가중될 전망이다.
특히 5∼7월 CIS에서 가전제품의 전형적인 비수기가 시작되고 있어 업체들의 고뇌가 더욱 커지고 있다.
더욱이 러시아는 지난 14일 외채 만기도래분 13억달러를 갚지못한데다 다음달 만기가 도래하는 25억달러도 갚을 능력이 없다며 국제통화기금(IMF)에 외채 상환기간 연장을 요청한 바 있어 국내 가전업체들의 한숨은 갈수록 깊어질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은용기자 ey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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