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벤처기업 (160)

 나는 10월 초에, 그러니까 10·26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이라고 하지만, 현역 사병이 그런 혜택을 입은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유학이라기보다 CIA의 초청으로 잠시 미국 육군통신연구소에 들어가 공부했던 것이다. CIA에서는 나를 활용할 목적으로 불렀고, 나는 그곳에 가서 좀 더 공부할 생각으로 응했다. 물론, 이런 일은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사장(사령관)이 결정한 일이었다. 부대 동료들은 시기와 선망을 가지고 한마디씩 했다.

 『상병 주제에 영관급 장교나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받다니. 새끼.』

 『컴퓨터 천재라 다르군. 아주 통통 튀는구먼.』

 『상고 나온 주제에 머리는 좋아서.』

 『영어와 일본어 하는 거 보면 대단한 놈이야.』

 『애인 만나는 일 말고는 항상 책 속에 파묻혀 있는 걸 보면 알만해.』

 『잘 됐지 뭐.』

 『개새끼.』

 내가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제일 가슴 아파 한 것은 송혜련과 헤어지는 일이었다. 좀 싸가지 없는 말이지만 어머니와 헤어지는 것보다 더 가슴 아팠다. 목포에서 살다가 컴퓨터회사에 취직이 되면서 고향을 떠날 때 나는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나도 같이 울고 싶었으나 어머니를 생각해서 참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송혜련과 헤어지는 마지막 만남이 있던 날 나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송혜련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제과점 안에서 두 사람이 코를 훌쩍이고 울자 종업원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일년이라는 기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인데, 하루만 보지 않아도 보고 싶은 입장에서 일년 동안 볼 수 없다는 것은 고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컴퓨터에 대한 열정은 여인에 대한 열정 못지 않게 나의 인생에 중요한 삶이 됐고, 내가 미국으로 가는 것은 바로 컴퓨터를 향한 투쟁이기도 했다.

 나는 송혜련에게 편지를 자주 한다고 약속했고, 한 달에 한 번은 꼭 전화 통화를 하자고 했다. 우리는 매달 첫째주 수요일 밤 아홉시(한국시각)에 전화통화를 하자고 했다. 미국 시간과 상충돼 나중에 그 시각은 변경됐다.

 그때 처음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우리는 서로의 몸을 꼭 끌어안고 한동안 놓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그날 밤에 그녀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서 다음날 은행에 출근하지 못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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