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장 개방이 본격화하면서 이제는 외화 한편을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기분이 든다. 「타이타닉」이나 「딥임펙트」 「아마겟돈」 등을 보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은하철도 999」나 「에반겔리온」 같은 일본작품들은 생각만 해도 샘이 난다. 생김새나 문화적 배경이 우리와 비슷한 일본은 어느새 컴퓨터 게임·만화·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주름잡고 있다.
우리는 왜 바닥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옛날처럼 나라 문을 닫고 살아 바깥세상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디를 가나 소위 식자층치고 지식산업의 중요성을 역설하지 않는 이가 없다. 신문·잡지·TV 등 매체마다 멀티미디어시대의 화려한 청사진을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정부도 각종 제도와 산업구조 개선을 비롯하여 수출시장 개척, 전문인력 양성, 영세업체 지원정책 등 많은 분야에서 의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머지않아 우리나라가 멀티미디어 선진국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이런 들떠 있는 사회분위기와는 달리 현재의 우리 속 실력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못하다. 정보통신기술은 혁신주기가 너무 빨라 우리 같은 기술 후발국으로서는 남다른 비상수단을 강구하지 않고서는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
우리 업체들이 이처럼 날로 벌어지고 있는 기술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자체 개발이나 기술도입보다는 아예 실리콘밸리를 찾아가 현지법인을 만들고 한창 물오른 현지기술자와의 공동개발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은 속도의 시대에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그로 인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발상은 뒤져있는 멀티미디어산업 분야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영화산업을 한 예로 든다면 정부와 민간의 공동출자로 이 분야에서 단연 앞서고 있는 미국 영화산업에 적극 투자, 선진기술과 노하우를 배워오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이상적인 방법은 미국 최고의 감독·배우는 물론 기술진·설계자·아트디렉터·프로그래머들을 대거 초빙, 우리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세계 수준의 명화를 제작하는 일이다. 이는 마치 정상급 프로 바둑기사가 되는 길과도 비교될 수 있다. 유단자가 되려면 처음부터 입신의 경지에 들어선 스승 밑에서 고된 실전 수련을 쌓으며 높은 안목과 경륜을 자력으로 익혀야만 그 다음에 수준 높은 자기 색깔을 낼 수 있다.
첨단장비로 가득찬 대형 세트장을 만들고 최고의 전문능력을 가진 프로들이 어떻게 팀워크를 이루며 어떠한 통합작업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가는지 그 과정을 우리 참여인력들이 하나하나 꼼꼼히 배우고 익히는 일만큼 값진 소득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우리의 정보콘텐츠산업 수준은 아직도 아마추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관객의 훈수 실력은 이미 유단자가 된 지 오래다.
이런 어려운 여건에서도 심형래 감독의 「용가리」가 국제영상물 시장에서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집요한 도전의식 하나만으로 수준급 SF 영상물을 만들고 또 수출길마저 외롭게 열어간 것을 보면 지적창조 분야는 반드시 거창한 계획이나 첨단기술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
특히 멀티미디어 콘텐츠산업은 여느 기술산업과 달라 세계문화로서의 보편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자기만의 독창성을 살릴 수 있어야만 국제사회에서 환영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진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차제에 이미 프로의 문턱에 다가선 「용가리」와 같은 국산 캐릭터들을 공들여 발굴하고 집중 지원을 펴는 정책전환이 뒤따른다면 우리도 멀티미디어 선진국으로의 길이 멀지만은 않을 것이다.
<백석기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 부설 정보통신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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