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다음날 시골로 내려갔다. 어머니가 떠난 후에 나는 자취방을 알아보았다. 경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숙집과는 달리 자취방은 도심지에서 구하기 힘들었다. 방을 얻는 데 돈이 많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 변두리로 나갔다.
불광동을 지나서 폭포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곳은 서울 행정구역에 있지만 논밭이 있는 시골풍경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추수를 마친 논에 볏짚이 쌓여 있고 산비탈에는 채소밭이 이어져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은 맑았고 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펌프로 물을 푸고 있었다. 개울을 따라 산에는 무슨 종교단체의 기도원이 있었는데 밤이 되면 할렐루야 하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간방을 하나 얻어서 생활했는데 부엌은 가마니로 가린 칸막이로 되어 있는 재래식이었다. 날씨가 추워지자 연탄을 땠다. 그런데 그 불이 자주 꺼져서 추운 방에서 잠을 잘 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이불 속에 온몸을 감싸고 얼굴만 내놓고 잤는데 방안에서도 입김이 하얗게 나올 만큼 추웠다. 연탄이 꺼져서 방이 추우면 이불을 온통 뒤집어쓰고 엎드려서 책을 읽었다.
추위로 몸을 떨면서도 나는 컴퓨터 서적에 몰입하면 한없이 빠져들었고 그지없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만약 경제가 허용하면 마이크로 컴퓨터를 가지고 싶었지만 당시만 해도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소유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느 때는 회사 연구실에서 귀가하지 않고 밤을 새우면서 컴퓨터를 만졌다.
그 무렵에 컴퓨터 관련 상가로 태동하기 시작한 청계천 전자상가를 기웃거렸다. 그러나 부품을 사기에도 가격이 비싼 것은 마찬가지였다. 67년 경제기획원에서 「IBM 1401」이 도입된 이래 80년대 말까지 모든 컴퓨터는 정부의 승인이 있어야만 도입이 가능했다.
구입하는 데 정부의 승인을 받을 뿐더러 우선 가격이 비싸서 소유할 수 없게 되자 나는 약간 건방진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청계천 전자상가에서 부속품을 사서 마이크로 컴퓨터를 조립하는 일이었다. 오늘날 같으면 컴퓨터를 조립해서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때만 해도 충분한 부품과 기술력이 없어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마이크로 컴퓨터를 PC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그무렵부터였다. 당시 PC 한대 값은 「애플」을 비롯한 외국제품은 약 4백만원이었고 삼보전자의 국산 「SE 8001」도 2백50만원이었다. 7만원 월급을 받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천문학적인 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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