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노총각 K씨는 모차르트를 들으며 잠이 깬다. 음악은 벽에 걸린 액자에서 흘러나온다. 액자는 알고 보면 교묘하게 위장된 평면 스피커.졸린 눈으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마칠 무렵 비디오폰이 울린다.
K씨는 재빨리 목욕가운을 걸치고 나온다. 폴리머 스크린(Polymer Screen)으로 만들어진 이 가운을 입으면 잠이 덜 깨 부시시한 얼굴일 때도 상대방 화면에는 잔뜩 멋을 부린 보습으로 비춰주기 때문.
아침식사를 위해 부엌으로 간 K씨가 냉장고에서 베이컨 달걀말이를 꺼내 오븐에 넣고 데우려는 순간 경보음이 울린다. 오븐이 건방지게도 작동하기를 거절하는 것.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여 있는 이 집의 가전제품들은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다. 욕실에서 몸무게를 재는 순간 홈닥터가 「오늘의 권장 칼로리」를 계산해 냉장고로 보내고, 냉장고는 주인이 어떤 음식을 꺼냈는지를 오븐에 알려준다. 이때 정해진 칼로리가 초과되면 음식은 조리되지 않는다.
달걀 대신 호박죽을 먹고 거실로 나온 K씨는 수족관을 쳐다본다. 에인젤피시와 옐로 탱이 수초들 사이를 누비는 어항은 사실 집안 구석구석을 장식한 VR디스플레이 중 하나. 벽면을 가득 채운 초대형 VR화면은 은사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 길을 비춰주고 있다.
평소에 좋아하는 채널을 자동으로 틀어주는 디지털TV도 가끔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다. 얼마 전엔 목사님이 찾아와 『자연에 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좀 볼까요』라고 말하자 「아마존의 에마누엘」이라는 야한 프로그램이 튀어나왔기 때문.
K씨는 오븐에 달린 터치 스크린을 눌러 인터넷 요리사이트에 접속한다. 음식재료를 온라인으로 주문하기 위해서다. 재료가 배달되면 요리는 물론 오븐에 맡길 생각이다.
한숨 돌리고 있으려니까 벨이 울린다. 어제 인터넷으로 주문한 옷이 배달된 것이다. 레이저로 스캔해놓은 몸매정보를 바탕으로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해본 후 주문한 옷이라 입어볼 필요도 없다. 계산은 열쇠만한 크기의 휴대형 정보단말기(PDA)를 켜고 전자화폐로 하면 된다. 이제 모든 준비를 끝낸 K씨는 느긋하게 앉아 디지털TV를 켠다.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마법의 거울은 없다. 하지만 기술예언가(Technology Prophecy)들은 다가올 밀레니엄을 눈앞에 보여준다. 위의 에피소드는 영국 출신의 랜 피어슨(Lan Pearson) 박사가 인터넷에 공개한 「21세기 어느날의 하루」.
이 가상 시나리오는 할리우드 SF영화 대본처럼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다. 미래학자들은 첨단 연구실에서 엔지니어들과 일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나오는 신기술을 근거로 21세기를 추정한다. 때로는 순서가 바뀔 경우도 있다. 정보사회의 패러다임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학자들이 먼저 신개념을 제시하면 엔지니어들이 그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기술을 개발해내는 것.
요즘 지구촌에서는 어떤 신기술·신개념들이 생겨나고 있을까. 글로벌 슈퍼 하이웨이와 인터넷의 결합은 21세기 정보사회의 인프라스트럭처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토대 위에 새로운 천년을 주도할 제품군으로 VR디스플레이·정보가전·초소형 PDA 등을 꼽고 있다. 이 세가지 기술은 결국 인간과 기계간 의사소통, 즉 맨 머신 인터페이스(Man-Machine Interface)가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게 될 것이다.
이 중 VR디스플레이는 현실을 쏙 빼닮은 가상공간. 앞으로는 헬멧 모양의 HMD(Head Mounted Display)나 특수안경, 데이터 글러브, 보디 슈트 같은 보조장비가 없어도 VR를 즐길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허공에 입체영상이 떠올라 가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프로젝션 VR시대가 열릴 것이기 때문. 이 디스플레이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가상공간에서 대화하는 일까지 가능해진다.
똑똑해진 정보가전들은 말을 알아듣게 된다. 음성 인터페이스와 몸동작 인터페이스로 집주인의 말과 몸짓을 감지하는 것. 가전제품들끼리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전화·TV·비디오·오디오뿐 아니라 부엌의 냉장고와 밥솥·오븐·난방기구까지 정보를 주고받게 된다.
초소형 PDA는 만년필 컴퓨터에서부터 귀고리형·열쇠형·단추형까지 무척 다양한 형태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공통점은 키보드가 없고 가상공간에 디스플레이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공상과학소설 같은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올해 미국과 일본에서는 이같은 전망을 뒷받침할 신개념의 제품들이 봇물을 이뤘다.
알바테크사는 얼마전 폐막된 「컴덱스 쇼」에 안경처럼 착용하는 아이글라스 방식의 컬러모니터를 선보였다. 무게 26g의 이 첨단 안경을 쓰면 26인치급 대형 모니터를 보는 듯한 시각체험을 할 수 있다. 휴대하고 다니면서 노트북PC나 PDA와도 연결할 수 있도록 상품화될 예정이다.
미놀타의 3D스캐너 「비비드(Vivid) 700」은 파퓰러 사이언스 최근호가 올해를 빛낸 과학기술로 선정한 제품. 작은 여행가방만한 크기의 이 첨단 스캐너는 오토매틱 줌렌즈를 이용해 물체의 이미지를 컬러 3D로 읽어들인다. 아직은 전문가용으로 3만7천달러의 고가품.
움직이는 물체의 영상정보를 실시간으로 PC에 전달해주는 동작인식 프로세서를 내놓은 곳은 도시바. 이 프로세서는 컴퓨터가 사람의 자연스러운 몸짓을 감지하도록 해준다. 렌즈와 이미지 센서, 그리고 8개의 발광 다이오드(LED)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미지의 화질은 아직 64×64 픽셀 정도.
음성인식도 연구가 활발한 분야다. 소호토크사는 얼마전 「Say…Do Assistant」라는 음성인식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말하면 행동하는 비서」라는 이름에 걸맞게 컴퓨터의 작업내용을 말로 지시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다.
드래곤시스템스는 전자수첩 크기의 휴대형 음성인식장치 「내추럴 스피킹」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람의 목소리를 40분간 녹음하고 메모리카드를 붙이면 80분까지 저장해주는 제품이다. PC와 연결해 문자파일을 만들어주는 것은 두 말 하면 잔소리. 벨기에의 L&H사도 음성만으로 워드프로세서 입력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그런가 하면 NCR는 올 가을 위의 시나리오에 등장한 오븐과 흡사한 첨단 전자레인지를 선보였다. 「마이크로웨이브 뱅크」라는 이름의 이 제품은 한마디로 PC+전자레인지. 전면에 LCD모니터가 달려 있고 인터넷과 연결된다. 터치 스크린으로 오늘의 추천요리를 선택한 후 쇼핑몰로 들어가 요리재료를 주문하고 전자결재를 하면 된다.
일본의 다이와연구소는 동경에서 열린 「IBM 페어98 전시회」에 휴대형 웨어러블PC를 출품했다. 이 신개념 PC는 본체와 소형 컨트롤러, 헤드세트로 이루어졌다. 컨트롤러는 손에 들고 헤드세트는 머리에 써야 한다. 본체는 휴대형 CD플레이어 정도의 크기에 무게가 2백99g으로 양복 윗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다.
헤드세트 오른쪽에 고정되어 있는 마이크로 디스플레이를 오른쪽 눈앞 3㎝ 지점에 위치시키면 PC화면이 나타나고 컨트롤러로 화면을 조작한다. 음성인식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컨트롤러에 장착된 마이크로폰에 작업지시를 내릴 수 있다.
컴팩사의 웨스턴연구소는 미래형 PDA 팩토이드를 개발중이다. 크기가 딱 열쇠만한 이 제품은 디스플레이도 키보드도 없다. 아직은 라디오 전파를 이용해 2백 바이트 미만의 자료만 보여주는 수준이다. 전화번호나 영업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주고받기에는 적합해 비즈니스용 PDA로 상품화가 추진되고 있다.
IBM은 1∼2년 안에 미래형 홀로그래픽 저장장치를 내놓을 예정이다. 레이저의 전자적 패턴을 이용해 데이터를 하드디스크 대신 크리스털에 광학적으로 담는다는 전략이다. 저장용량은 놀랍게도 각설탕 크기의 크리스털 하나당 1만쪽. 성공을 하게 되면 주문형비디오나 디지털 동영상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혁명적인 저장장치로 떠오를 것이 기대된다.
전자책(Electronic Book)은 요즘 출판계의 눈길이 쏠리는 신개념 제품이다. 누보미디어가 리라이터블 북으로 소개한 「로켓 e북(Rocket ebook)」은 이미 베스트셀러. 이 제품은 무게가 5백67g으로 컴퓨터 하드웨어나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자료 4천쪽을 저장해서 책처럼 가지고 다닐 수 있다.
AT크로스사는 문자인식 특수 펜으로 종이에 글씨를 쓰면 내용이 메모리에 저장되는 「크로스 패드(Cross Pad)」라는 제품을 3백99달러에 내놓았다. 들고 다니면서 최고 50쪽 분량까지 정보를 메모해둘 수 있고 데스크톱PC와도 호환된다.
한편 실리콘그래픽스사의 리얼리티 센터(Reality Center)는 가상현실의 미래를 짚어볼 수 있는 곳. 초대형 디스플레이가 설치된 소극장으로 관객들에게 아무런 보조도구 없이 가상현실을 체험하게 해준다.
<이선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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