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격동의 시대-IBM과 제휴 (5)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설 전산개발센터의 명칭이 KAIST 부설 시스템공학센터(SERI)로 바뀐 것은 84년 11월이었다. SERI로 재출발하면서 2부 2실 체제의 조직도 3부 2실 11연구그룹으로 크게 확대됐다. 80년 12월 이공계 출연연구소 축소통폐합 이후 만 4년 만이었다. 조직의 중추인 3개 부(部)는 소프트웨어 개발을 전담하는 전산개발부와 시스템 운영관리를 맡은 전산운영부, 그리고 이번 회에서 집중적으로 소개할 소프트웨어엔지니어링부(SEC:Software Engineering Center) 등으로 구성됐다. SERI 출범 당시 전산개발부의 11개 연구그룹은 자동화시스템개발그룹(1그룹), 엔지니어링SW연구그룹(2그룹), 교육평가시스템연구그룹(3그룹), 그래픽연구그룹(4그룹), 경영정보시스템연구그룹(5그룹), 운용과학연구그룹(6그룹), 데이터베이스연구그룹(7그룹), 통계연구그룹(8그룹), 자동교육(CBE)연구그룹(9그룹), 원격탐사연구그룹(10그룹), 교통연구그룹(11그룹) 등이었다.
이런 조직구성은 오늘날 정보산업의 중추가 된 주요 소프트웨어 분야의 기초가 이때 벌써 닦여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84년 11월 이후 SERI는 80년의 축소통폐합을 비웃듯 비약적인 조직확대를 꾀하게 된다. 여기에는 정보산업의 확대발전이라는 일반적인 요인도 작용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부예산이나 출연금 위주로 조직을 운영하던 다른 출연연구소들과는 달리 SERI의 활동이 그만큼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SERI의 조직확대는 전산개발부와 SEC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11개 연구그룹체제이던 전산개발부의 경우 88서울올림픽 전산화프로젝트 등을 거치면서 무려 제26연구그룹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인원도 SERI 출범 당시 2백70여명이던 것이 올림픽전산시스템 개발을 완료할 당시는 5백70여명으로까지 증가하기도 했다. SERI의 또다른 축인 SEC는 85년 7월 미국 IBM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출범한 조직이었다. SEC는 그 출범 자체가 소장 성기수의 과학기술자로서의 자존심과 IBM의 기업적 요구가 적절히 조화돼 빚어진 작품이었다. SERI가 SEC를 통해 IBM으로부터 얻고자 했던 것은 초거대 기업 IBM의 기술 노하우였다. 그 가운데서도 공학(Engineering) 차원의 고급 소프트웨어기법의 축적은 올림픽전산화 프로젝트 등 초대형 프로젝트 수행을 통해 세계적인 전산센터로서 거듭나려는 SERI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SERI가 SEC 출범을 위해 IBM과 교류를 튼 것은 83년 말이었다. 이에 앞서 83년 초 IBM은 정부를 통해 국립 서울대학교에 1천만달러 규모의 컴퓨터장비를 조건없이 무상제공해 교수들이 연구 프로젝트에 활용하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우리 정부나 서울대가 먼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IBM이 먼저 그렇게 나선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의 전산 스폰서였던 IBM은 서울올림픽을 앞둔 시점에서 한국에 기술 개발·지원 거점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5공화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역학관계 때문에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있던 때여서 IBM은 어떤 형태로든 한국의 기업활동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 시점에서 IBM은 정부가 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선포하자 즉시 이같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IBM의 제안에 대한 서울대의 반응은 의외였다. 서울대측은 제공받을 컴퓨터 장비(초대형급 컴퓨터 IBM3033 1대, 그래픽워크스테이션 20대, 사무용 컴퓨터(IBM5550) 1백대 등)를 들여 놓을 곳이 없으니 2백억∼3백억원 규모의 전산실을 지어 함께 기증하라고 답했다. 한마디로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당황한 것은 서울대를 IBM에 추천했던 과기처였다.
언제나 그랬듯 성기수는 스스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울대가 사실상 IBM의 제의를 거부했다는 소식을 들은 성기수는 IBM 관계자들을 만나 그 제안을 SERI가 받겠다고 거꾸로 제안했다. 서울대를 포함한 전국의 모든 대학교수에게 컴퓨터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 등 IBM의 당초 의도를 충분히 반영한 수정안을 제시했다. 대신 성기수는 최첨단 기술연구소의 상징인 미국IBM 윗슨연구소에 SERI연구원들이 연수할 수 있도록 IBM측에 요청했다.
그즈음 SERI는 자체 보유한 컴퓨터파워를 시간대별 단가계약으로 전국의 대학과 연구소에 제공하고 있었는데 그 수입이 만만치 않았다. IBM에서 제공받을 IBM3033을 무료로 개방하면 단가계약 수입은 크게 줄어들 것이 뻔했다. 그러나 SEC의 출범은 더 큰 전략적 가치를 갖고 있었다.
서울대학교에 제안한 내용이 백지화되면서 83년 말부터 SERI와 IBM이 새로운 협의를 시작했다. 과기처 장관 이정오(KAIST 석좌교수)가 미국 방문 길에 IBM 미주·극동본부회장 랄프 파이퍼를 만나는 등 발걸음이 빨라졌다. 마침내 1년여의 협의 끝에 84년 11월 이정오와 랄프 파이퍼 사이에 양해각서가 교환됐다. 각서 내용은 △SERI와 IBM의 공동협력사업을 위해 SEC를 비영리로 운영할 것 △IBM은 사업수행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SEC 출범부터 4년간(85년 7월∼89년 7월) 지속적으로 충분히 제공한다는 것 등이었다.
SEC 출범 이전부터 SERI와 IBM 사이에는 많은 교류가 있었을 법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78년 말 SERI가 IBM으로부터 대형컴퓨터 IBM3032를 들여온 것이 두 조직 사이에 이뤄진 교류의 전부였을 정도다. 그나마도 IBM3032는 주력업무보다는 IBM기술부문이 필요할 때(당시 정보산업에 대한 IBM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으므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IBM의 지원에 의해 SEC가 출범한 것이 두 조직 간에 있었던 두번째 교류였던 셈이다.
컨트롤데이터(CDC)의 과학기술계산용 계열 컴퓨터들을 주로 도입·사용해 오던 SERI가 결과적으로 IBM 기종을 선호하지 않았던 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SERI가 개발한 시스템이나 소프트웨어가 공공기관용이거나 과학기술계산용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IBM 컴퓨터가 금융기관이나 대기업전산화 등 상업용으로 큰 강점을 지녔던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또 하나는 IBM 기종이 지나치게 고가라는 점이었다. 가격이 비싼 이유는 시스템 안정성과 성능 등 컴퓨터에 관한 한 모든 면에서 최고를 내세우던 IBM의 경영전략과 관련이 있었다. 실제로 이런 고가전략은 고객들에게 그대로 먹혀들어가 IBM은 적어도 80년대까지는 고객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고객을 맞기에 바빴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성기수가 IBM의 SEC 무상지원 제의를 감지덕지하여 덥석 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IBM과의 SEC 출범 협의가 처음부터 밀고 당기는 협상으로 바뀌어버린 것은 처음부터 성기수가 『우리는 받더라도 수그리지 않고 앉아서 받는다』라는 자세를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협의기간이 1년 가까이 이어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IBM 측에는 성기수가 「꼿꼿하고 오기만만한 모습」으로 비쳤겠지만 이는 좀더 아쉬운 입장에 있던 IBM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그리고 당당한 입장에서 얻어내기 위한 계산이었다(인용 부문은 당시 SEC 소속 연구원이었던 주혜경 현 삼성SDS 이사의 표현).
SEC 출범 후에도 성기수는 IBM에 대해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85년 SEC 출범을 전후해 SERI는 또 다른 신규기종 도입을 위해 IBM과 교섭했으나 예의 고가정책에 부딪혔다. 책정된 예산으로는 도저히 IBM이 제시한 가격에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는 IBM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호환을 실현한 NAS·암달(Amdahl) 등 플러그인 호환기(Plug-In Compatible) 업체들이 각광을 받고 있었다. 플러그인 호환방식이란 독자적으로 개발한 하드웨어에 IBM의 소프트웨어를 얹어 실행시키는 것이었다. 호환기업체들은 콧대 높은 IBM의 고가전략 틈바구니 속에서 가격은 IBM의 절반이면서 성능은 오히려 IBM을 앞선다는 평가를 받으며 꽤 괜찮은 장사를 하고 있었다.
예산때문에 IBM 기종을 포기한 성기수는 여러 가지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조건이 매우 좋은 NAS 기종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IBM을 섭섭하게 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IBM을 섭섭하게 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SERI의 선택은 NAS와 암달의 신뢰성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삼성그룹 등 10곳의 대형 고객들로 하여금 마침내 호환기 쪽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컴퓨터를 새로 도입하려던 삼성그룹 등은 IBM 기종과 100% 호환이 가능하다지만 그래도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 때문에 호환기 도입을 미뤄오던 터에 SERI의 선택을 절대적으로 신뢰해버린 것이었다.
한편 IBM은 SEC의 출범과 함께 IBM3083JX 초대형 컴퓨터를 비롯, 캐드캠 등 1백여종의 소프트웨어를 포함해서 모두 1백억원에 이르는 컴퓨터 장비를 SERI에 제공하고 여기에 다시 연 1백70명에 이르는 연구원들을 미국 본사의 윗슨연구소로 보내 최첨단 소프트웨어공학기법을 전수하도록 했다. 연구원들의 대규모 연수경험은 SERI가 독자적으로 서울올림픽 전산화와 93대전엑스포 전산화와 같은 초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연수를 받은 연구원들을 SEC교육센터에 활용함으로써 89년 7월까지 무려 4천여명의 전문인력을 양성해내는 또 다른 결실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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