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대망의 70년대-거듭나는 KIST 전산부 (10)
77년 3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66년 발족 이후 꼭 10번째의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지난 회에서 설명했던 대로 76년말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한국표준연구소 등 10여개 단위연구소들이 독립하면서 KIST는 대대적인 조직정비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기존의 4부소장 11부 4센터 체제이던 것이 3부소장 3연구부장 4센터 7실이 됐다. 한마디로 축소개편이었다.
이에 앞서 KIST는 76년 2월 3부소장 6부 체제를 4부소장 11부 4센터 체체로 확대하는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한 적이 있었다. 이때 2실 체제였던 성기수의 전자계산부도 7실 체제로 대폭 확대되면서 명칭도 KIST 전자계산조직연구부로 바뀌었다. 그러나 KIST전체의 축소개편 회오리에 휘말리면서 전자계산조직연구부 역시 2실 3과 4담당 체제로 76년 이전 체제로 원상복귀되고 말았다. 정식 명칭 역시 기존 부와 실의 중간쯤인 KIST 전산개발센터로 또다시 바뀌었다.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에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이 종합출연연구소 중심에서 단위 출연연구소 중심으로 대폭 수정된 것이었다. 77년의 축소 개편은 KIST 산하 조직들의 전반적인 위축을 가져왔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전산개발센터의 경우 외형적으로는 조직이 축소됐지만 전체 재원 확보는 오히려 증가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그만큼 컴퓨터 도입 및 전산개발 수요가 폭발하던 시기였다. 76년 외부 수탁 계약고를 포함한 전체재원 규모가 4억4천만원이던 것이 77년에는 2배가 넘는 8억5천만원, 79년에는 무려 31억원으로 폭증했다. 폭증한 것은 대부분 민간부문의 전산화였다.
전산개발센터로의 재출범을 전후한 77년 이후 79년말까지 수행했던 외부 수탁 프로젝트들을 보면 남광토건 주식관리, 77학년도 부산시 중학교 무시험추첨, 한국방송통신대학 학생성적관리, 다우케미컬 회계업무, 영진약품 판매관리, 수산청 어업통계, 77∼79학년도 대입예비고사, 인천시 재산세업무, 삼도물산 관리업무, 남해화학 회계업무, 한국화이자 약품통계업무, 77년도 부산시 재산세·자동차세·주택부금·수도요금 업무, 대한중기공업 급여업무, 한국낙농유업 전산화, 원호청 정착대부 업무 및 원호대상자 실태조사 전산화, 보건시범기초조사 통계처리, 한국증권대체결제주식회사 명의개서 업무, 삼익악기 전산화, 한미기획단 전산용역, 대한재보험 전산화, 한국동경실리콘 급여업무, 삼양타이어 전산화, 동경전자 급여업무, 한국과학원(KAIS) 연구업무 전산화, 대한제당 전산화, 경희의료원 전산화, 의료보험관리공단 전산화, 제일투자금융 전산화, 한국핵연료개발공단 전산화 등 40여건에 이른다.
같은 기간에 수행한 연구과제들로는 컴퓨터의 데이터 무선장치에 관한 연구, 자동제도기 설치에 따른 소프트웨어 개발연구, 행정전산화 시범연구사업, 정보산업 토착화를 위한 소프트웨어 이전체제 개발연구, 항공기산업 육성방안 조사연구, 한글용 컴퓨터 단말장치에 관한 연구, 산업기술개발 및 생산에 필요한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한 연구 등 10여건이 있다.
78년 KIST 전산개발센터는 급증하는 외부 수탁업무 개발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CDC 3300」과 「사이버72-14」에 이은 세번째 컴퓨터 「IBM 3032」를 도입했다. 전산개발센터로서는 처음으로 도입하는 IBM기종이었다. IBM기종은 전산개발센터에 여러가지 의미를 가져다 줬다.
77년까지 전산개발센터가 수행했던 수탁업무나 연구개발은 공공부문의 전산화에 집중돼 있었다. 그런데 공공부문은 통계처리, 금융업무, 전화·수도·재산세 과금 업무, 예비고사채점처리 등 통계처리가 대부분이어서 컨트롤데이터의 CDC나 사이버 시리즈와 같은 과학기술계산용 컴퓨터가 제격이었다. 하지만 민간 부문의 전산화는 급여·관리·판매 등 경영정보시스템(MIS)개발 중심이어서 아무래도 상업용으로 개발된 컴퓨터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IBM기종은 전통적으로 상업용에 적합하도록 개발된 컴퓨터였다.
성기수가 「IBM 3032」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물론 단순히 민간부문의 전산 개발업무가 폭증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즈음 성기수와 전산개발센터 연구원들은 한국IBM등 컴퓨터업체들로부터 한가지 원성을 사고 있었다.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모두 큰 영향력을 가진 전산개발센터가 굳이 컨트롤데이터 기종으로만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이유가 뭐냐는 불만이었다. 이 불만은 전산개발센터가 전산개발을 수행해준 공공기관들 대부분이 자체 도입 컴퓨터로서 컨트롤데이터사의 기종을 선택해 버리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에 대해 관련기관들은 겉으로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전산개발센터와 같은 컴퓨터 기종을 유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곤 했다. 하지만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어하는 공무원들의 관료적 타성이 업체들의 불만을 촉발시키는 더 큰 요인이 됐다. 전산개발센터가 다 알아서 해주는데 굳이 다른 기종을 도입할 일이 없다는 식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컨트롤데이터 측은 공공기관에 고가의 컴퓨터 장비를 어렵지 않게 공급할 수 있었다.
67년부터 79년까지 국내에 보급된 컴퓨터는 모두 4백27대였는데 도입가격이 1백만 달러 이상 고가의 메인프레임급 컴퓨터는 56대나 됐다. 이 가운데 CDC와 사이버시리즈 등 컨트롤데이터가 공급한 컴퓨터는 무려 9대나 됐다.
당시 편찬된 과기처 과학기술연감에 따르면 70년대 컴퓨터들은 도입가격에 의해 초대형·대형·중형·미니급 등으로 분류됐다. 가격차이는 곧 성능과 용량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KIST전산개발센터가 72년 도입한 초대형컴퓨터 「사이버72-14」가 1백75만 달러였던 것에 반해 같은해 KIST 방식기기실이 「메모콜」 프로젝트(지난 회에서 설명)수행을 위해 데이터제너럴(DG)로부터 도입한 미니급 「노바01」 3대의 가격은 도합 6만 달러에 불과했다. 대체적으로 대형 이상 메인프레임 컴퓨터는 1백만달러 이상, 중형은 20만달러 이상 1백만달러 미만, 미니급은 20만달러 미만 기종으로 분류하는 것이 통례였다.
컨트롤데이터 측이 정부부처·출연기관·금융기관 등 공공부문에 공급한 9대는 대부분 메인프레임급이었다. 더욱이 당시 전산개발센터의 「사이버72-14」의 온라인 서비스를 받는 곳이 전국적으로 1백여 곳에 이르러 컨트롤데이터의 고객은 갈수록 늘어날 판이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컨트롤데이터는 KIST전산개발센터를 발판으로 공공부문을 집중 공략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성기수와 전산개발센터가 관련업계로부터 오해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IBM 3032」는 바로 그런 시점에서 도입이 결정된 기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기수는 때마침 공공부문의 전산화가 어느 정도 궤도에 이르렀다는 판단 아래 민간기업의 경영 전산화에 힘을 쏟기로 한 터였다.
제3호기 기종 도입 선정작업은 전산개발센터 산하 전산기술과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IBM·스페리·후지쯔 등 여러 회사의 기종들이 물망에 올랐다. 최종적으로 「IBM 3032」를 선택한 것은 성기수였다.
성기수는 1호기인 「CDC 3300」을 도입할 당시부터 컴퓨터 도입에 대한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워두고 있었다. 「최고 기종, 최신예 기종」이 바로 그의 기종선정 원칙이었다. 당장에는 용량이 넘친다 하더라도 가능한 한 대용량의 컴퓨터를 도입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하드웨어에 따라 규모가 결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1백만달러 짜리 하드웨어에서 개발되는 소프트웨어가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갖는 것은 당연했다. 컴퓨터가 대용량일수록 소프트웨어의 가치는 커질 것이었다. 연구소의 발전과 각 부문의 전산화도 그만큼 앞당겨질 것이었다.
「IBM3032」는 60년대의 360시리즈, 70년대 370시리즈에 이어 IBM이 80년대 컴퓨터 명문가로의 대를 잇기 위해 개발한 전략 기종이었다. 뿐만 아니라 최소 시스템 구성 가격만 3백만 달러가 넘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의 컴퓨터였다. IBM 메인프레임의 표준 운용체계로 정착된 「MVS」도 이 기종에서부터 채용이 됐다.
문제는 기종도입 비용이 KIST에서 책정한 예산에 비해 턱없이 높았다는 점이었다. 성기수는 원칙대로 무조건 밀어붙였다. 그러나 제한된 예산 범위에 맞추다 보니 「IBM 3032」는 본체(CPU)를 중심으로 최소 구성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가령 「MVS」를 동작시키려면 4MB이상의 메모리가 필요했지만 최소 단위인 2MB로만 구성하는 식이었다. 물론 이런 결정은 확장용 시스템이나 필요한 주변장치 구입비용은 이듬해부터 예산신청 때 반영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성기수가 개발한 이같은 컴퓨터 도입 방식은 88년 슈퍼컴퓨터 도입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적용됐다.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성기수식 컴퓨터 도입이 이루어지지 못했더라면 전산개발센터의 발전이나 정보화에 대한 역할 확대는 기대하기가 힘들었을 터였다. IBM3032의 도입은 컨트롤데이터사의 컴퓨터에 편향돼 있던 전산개발센터 연구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과 함께 새로운 컴퓨팅 환경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제공받는 계기가 됐다.
「IBM 3032」는 80년대 중반까지 전산개발센터의 주력 기종으로서 최초의 전국 네트워크 체체로 개발된 의료보험전산화를 비롯 88올림픽전산화의 발단이 된 83년 인천 전국체전전산화 등 요긴한 곳에 사용됐다. 물론 폐기될 때까지 「IBM 3032」는 수시로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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