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대망의 70년대-대규모 데이터 전산화 (5)
70년초만 해도 컴퓨터는 고도의 과학기술분야 계산에만 사용될 것이라는 것이 다수 식자(識者)층의 인식이었다. 식자층들은 오히려 컴퓨터를 만능의 기계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일반인들과 달리 그 다양한 응용성이나 확장성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기업들 역시 이같은 인식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인건비가 아직 저렴하던 시기였던지라 컴퓨터 계산보다는 주판(珠板)의 효용성에 더 많은 기대를 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런 분위기를 일신하고 컴퓨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산시켜준 사건이 바로 7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전산실이 완료한 전화요금 고지서 발급업무와 대학입학 예비고사 채점업무 등 두 건의 전산화였다.
70년 11월에 완성된 한글라인프린터(지난 호에서 설명)를 전제로 수행된 이 두 건의 전산화는 단순히 과학기술계산용에 국한될 줄 알았던 컴퓨터가 수십만 건에 이르는 대규모 데이터처리에 매우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해준 사건이었다.
두 프로젝트의 성공은 작게는 KIST전산실의 능력과 신뢰성을 극적으로 제고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규모 공공프로젝트가 잇따라 발주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정보산업 측면에서는 어떤 분야라도 전산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계기가 됐다.
70년초만 해도 전화요금고지서는 물론이거니와 수도요금, 전기요금, 재산세 등 일반가정에 배달되는 고지서는 모두 수기(手記)로 작성되던 시절이었다. 그 내용이란 게 고작 가입자나 수요자의 이름, 주소, 금액, 그리고 안내문 몇 줄을 표기한 정도로 단순한 것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수십만∼수백만장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예컨대 전화요금 고지서의 경우 전화가입자가 갈수록 급증하는 추세여서 수기처리는 업무 생산성이나 비용처리 등에서 여러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주무부처였던 체신부도 가입자가 가장 많이 몰리는 서울시내부터 업무전산화를 적극 검토하고 나섰다. 하지만 체신부 측도 전화요금 고지서를 자동발급하는 작업이 『과연 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 때문에 전산화에 대한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미국의 OSI(Optimum System Inc.)라는 전산화 컨설팅회사가 체신부에 전화요금고지서 업무의 전산화를 제안하고 나섰다. OSI는 이어 70년 봄 전화요금고지서 발급업무 전산화개발 예비타당성조사 보고서라는 것을 만들어 직접 체신부에 전달했다. 4백여 쪽이 넘는 방대한 보고서는 그러나 모든 내용이 영문으로 돼 있는데다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전산 전문용어들이 수두룩했다. 체신부 관리들이 이 보고서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KIST전산실장 성기수가 OSI의 보고서를 손에 쥘 수 있었던 것도 그 즈음이었다.
어느날 체신부의 한 관계자가 성기수를 찾아와 OSI의 보고서를 번역해서 알기 쉽도록 요약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갔다. 그렇지 않아도 관심이 있었던 터에 정보가 저절로 굴러 들어온 셈이었다.
OSI측 보고서는 말미에서 서울시 전화요금 고지서 발급업무를 3년 6개월 이내에 마칠 수 있으며 초기 위탁 운영비용까지 5백만 달러의 프로젝트 비용이 소요된다고 결론을 맺고 있었다. OSI는 전산화 프로젝트 경험도 풍부하고 분석기법들도 앞서 있는 세계적인 회사였다. KIST전산실 입장에서도 OSI와 직접 경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성기수는 OSI보고서를 정독한 다음 체신부 관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내용을 요약하여 단 한 쪽짜리 보고서로 만들었다. 원래 관리들은 복잡하고 너절너절한 보고서는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성기수는 바로 그런 점을 역이용하여 한 쪽짜리 요약보고서 말미에 슬쩍 다음과 같은 문구 하나를 추가시켰다.
물론 어떤 경험이나 근거를 갖고 그렇게 써넣은 것은 아니었다. 연관 효과가 큰 기간 분야나 공공부문의 전산화를 처음부터 외국업체에 넘긴다면 KIST전산실 같은 출연연구소는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독자적인 기술개발이나 연구기회는 사라져 앞으로 쏟아질 국책 프로젝트들은 모두 외국업체 손에 넘어갈 터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무조건 따놓고 보자는 것이 성기수의 생각이었다.
그런 배짱의 이면에는 역대 체신부 장관의 재임기간이 평균 1년밖에 안된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프로젝트 계약 당시의 장관과 프로젝트 완료 때의 장관이 다를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이었다. 실제로 프로젝트 완료 당시의 장관은 신상철(申尙澈)로 바뀌어 있었다. 어차피 OSI가 제시한 기간이 3년6개월이었고 금액 규모도 20분의 1밖에 안됐으므로 실패한다 하더라도 다음 1년 동안에 다시 하면 그만이었다.
비용조달 문제로 고심했던 체신부로서도 성기수의 제안은 상당히 매력적인 것을 보였다. 마침내 70년 11월 KIST 전산실과 체신부간 계약이 성사됐다. 계약금은 5백만달러의 20분의 1도 채 안되는 7천만원(70년도 환율 314원)이었고 프로젝트 수행기간은 71년 10월까지 1년이었다.
성기수는 당시 KIST 전산실 직원 50여명의 직원 가운데 3분의 1 이상을 투입하는 사실상의 총력전을 폈다. 사진기를 동원해 서울시내 각 전화국의 가입자 미터 데이터를 수집해오는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사진 속의 데이터를 천공작업(Key Punching)을 통해 일일이 카드에 입력하는 과정이 가장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다.
이 과정을 쉽게 해결해 보기 위해 도입한 것이 바로 OCR/OMR장비인 「CDC936」이었다. 이 장비의 도입가격은 무려 30만달러나 돼 체신부와 계약한 프로젝트비용보다도 오히려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비는 전화요금고지서 발급업무 전산화에서보다는 72학년도 대학입시 예비고사 채점전산화 과정에서 더 요긴하게 쓰였다. 그 이유는 문자인식기술이 아직 보편화하지 않은 시점이어서 섣불리 OCR기능을 사용했다가 단 한 건이라도 오식(誤識)된 고지서가 발부될 경우, KIST전산실의 신뢰도는 그날로 땅에 떨어질 게 뻔했다. 예비고사 채점 전산화 과정에서도 역시 OCR가 아닌 OMR 기능이 주로 적용됐다.
입력된 데이터를 처리하고 이를 라인프린터를 통해 한글고지서로 출력해 주는 프로그램은 코볼언어로 작성했다. 코볼 프로그램의 작성은 이제까지 포트란 등 주로 과학기술용 언어만을 이용하던 KIST로서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전산실 내에서 당장 코볼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문법체계를 배워가면서 프로그램을 짰다.
서울 동대문전화국 관내 전화가입자들에게 한글로 된 요금고지서가 발부되기 시작한 것은 정확하게 71년 10월 고지 때부터였다. 체신부와 약속했던 계약기간 내에 전산화가 성공한 것이었다. 비용면에서는 8천만원이 초과됐으나 그나마도 체신부와 3년간의 위탁 운영 계약으로 보전할 수 있었다.
한편 이에 앞서 KIST 전산실은 69년도 말에 실시된 70년도 대학입학 예비고사 채점 전산화를 수행하게 됐다. 이 당시는 제1호 컴퓨터인 「CDC3300」가 막 도입된 직후여서 예비고사 채점전산화 소식은 사회적으로도 큰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첫 해(예비고사 시행 년도로는 2차 년도) 대학입학 예비고사 채점 전산처리는 대량 데이터 처리 필수장비인 「CDC936」이 KIST전산실에 도입되기 전이어서 그 어려움과 번잡스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험생이 12만5백80명이었고 대학정원이 4만6천3백 명이나 되는 등 데이터 규모(채점답안지)도 전화요금고지서 규모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첫 해와 두번째 해는 일부 업무만 전산처리하는데 그쳤는 데도 전화요금 고지서 발급업무 전산화 때보다 훨씬 많은 수작업이 필요했다. 사실은 말이 전산화지 시험지 채점이나 수험생의 종합성적표 작성 등 중요한 업무과정은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됐다. 채점과 성적표 작성은 현장의 감독교사의 몫이었다. KIST전산실은 전국에서 모아진 수험생 개인성적표 데이터를 천공작업을 통해 80칼럼 카드에 옮긴 후 지역별 합격선이나 합격증의 자동 발급 정도가 고작이었다. 수작업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처리 과정의 보안이 더욱 강화되기도 했다.
80컬럼 카드에 데이터를 입력하기 전 감독교사가 채점한 답안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3백명의 여대생을 KIST대강당에 연금(?)시키고 3일 낮 밤을 세워 답안을 옮겨 적는 과정이 있었는가 하면 상업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주판으로 합산을 하고 체크된 에러를 확인하느라 산더미처럼 쌓인 시험답안을 뒤지던 우스꽝스런 일이 연이어 벌어지곤 했다.
이런 수기작업들이 완전 전산화한 것은 71년 말에 치러진 72학년도 예비고사 채점 때, 즉 「CDC936」이 도입되면서부터였다. 수험생들에 배부된 답안지가 광학물질이 포함된 수성펜만을 사용하는 OMR카드로 바뀐 것도 이때부터였다.
전화요금고지서발급업무와 대학입학 예비고사 채점 전산화에 성공은 곧바로 서울시 상수도요금 고지서 발급업무, 전매청 업무, 중학교 무시험진학 추첨업무 등 공공업무가 잇따라 전산화되는 계기가 됐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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