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러시아 "모라토리엄" 선언 파장

러시아가 90일간의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 선언과 함께 사실상의 대폭적인 루블화 평가절하를 단행해 국내 경제에 비상이 걸렸다. 이번 러시아의 조치는 국내 외환시장이 아직도 불안한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일본 엔화 약세와 중국 위안화 평가절하 가능성 등으로 가뜩이나 수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전자, 정보통신업계가 받는 충격은 더욱 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이란 극단적인 조치를 단행하게 된 것은 재정수입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밀려오는 외채부담을 견디지 못해 나온 고육책이긴 하지만 과정은 우리가 IMF체제로 들어선 작년 말 상황과 흡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러시아가 2백26억 달러의 IMF 구제금융으로도 사태를 반전시키지 못한 것이어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러시아의 이번 조치가 세계 경제는 물론 우리나라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태국의 바트화 폭락으로 촉발된 것임을 이미 확인했듯이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은 세계적 금융공황으로까지 발전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선 3백억 달러가 넘는 투자로 러시아의 최대 채권국인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금융기관들은 당연히 거대한 부실채권을 떠안게 되고 이로 인해 불안한 아시아권에서 투자자본을 조기 회수할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유럽은 우리나라의 외채비중이 가장 큰 지역이어서 단기적 영향이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정부가 발빠르게 가용외환 보유고 5백억 달러의 조기확보와 함께 파장축소를 위한 대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러시아 사태가 우리에게 가져올 직접적인 피해는 크다. 당장 러시아에 제공한 경협차관 17억 달러와 국내 금융기관의 러시아 국, 공채 투자 10억 달러의 회수가 현재로선 불투명하게 됐다. 물론 러시아가 이번 채무지불 유예범위를 루블화 표시채권에 한정한 것이어서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전자 3사가 러시아와 거래하면서 받은 달러표시 수출신용채권 1억 달러의 회수도 안심할 수만은 없다. 통신업체들의 러시아 수출 미수금도 2천3백만 달러를 상회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또한 전자교환기와 가전 부문에 총 4백80만 달러를 투자한 삼성전자와 나홋카에서 시내전화사업을 벌이고 있는 LG정보통신을 비롯, 한국통신, 데이콤 등 러시아에서 통신서비스에 참여하고 있는 업체의 투자대금 회수도 차질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수출전선에서 받을 타격이다. 공식집계로는 지난해 러시아 수출이 17억 달러에 불과하나 우회수출과 보따리수출까지 포함하면 1백억 달러는 족히 넘을 것이라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특히 전자업계의 경우 홍콩, 싱가포르 등 해외시장을 통해 우회수출한 몫까지 포함하면 전체 가전제품 수출의 20%를 러시아에 수출한 터라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번 사태로 차질을 빚게 될 러시아 수출공백을 대체할 시장이 없다는 데 있다. 현재 가전3사가 예상하는 러시아 수출 차질액은 약 3억 달러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옛소련지역(CIS)에 영향을 미쳐 이 지역에 대한 수출위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 경우 올해 수출목표 달성에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그만큼 국내공장의 가동률도 떨어지고 이로 인한 유휴설비 및 인력으로 인한 비용상승으로 적자까지 감수해야할 상황이다. 전자3사는 이번 사태의 영향이 러시아와 CIS지역에 국한된다면 비록 적자를 보더라도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으나 파장이 예상외로 확대돼 그나마 수출호조를 누리고 있는 중남미나 중국 등 타 지역으로 확산될 경우 최대위기를 맞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러시아 사태는 이미 엎지른 물인 만큼 충격의 폭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다각적인 대책을 시급히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이번 사태의 최대 피해를 입은 유럽지역 금융기관들의 채권회수에 대비해 가용외환 보유고를 확충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와 함께 정부는 우리가 착실하게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는 점을 국제금융 기관에 알려 혹시라도 있을 선진국의 발빼기에 대비해야 한다. 관련부처는 일일점검반 등 대책기구를 구성해 민간경제계와 긴밀한 협의 아래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기동성 있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수출증진과 투자유치를 통한 외환확보의 필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전자, 정보통신업계도 이번 사태가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 구조조정의 가속화와 수출전략을 새롭게 짜는 자구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러시아 현지에 판매법인을 운영중이거나 인접지역에 생산시설을 가동중인 경우 사업전략 재검토와 함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노력할 것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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