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29)

  제6부 대망의 70년대-한글 전산화 (4)

『컴퓨터를 이용해서 매분당(每分當) 적어도 1만8천자의 한글을 찍어낼 수 있는 한글 전자인쇄장치가 개발에 성공, 30일 KIST에서 가동하기 시작함으로써 우리나라도 컴퓨터 프린트시대로 들어가게 됐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成琦秀 박사(전자계산실)와 CDC가 지난 2년간 공동으로 연구 개발한 이 장치는 한글을 풀어쓰기로 해서 컴퓨터의 기억장치 속에 넣은 다음 가동을 시키면 한글표준자판을 통해 자동적으로 모아쓰기로 찍혀 나오게 된다.』

70∼80년대 과학기자와 과학칼럼니스트로서 명성을 날렸던 현원복(玄源福)이 「서울신문」에 이 기사를 쓴 70년 11월 30일은 컴퓨터가 사상 처음으로 한글을 인쇄하기 시작한 날로 기록되고 있다. 다음날 「조선일보」 「한국일보」 「동아일보」 「코리아헤럴드」 등이 일제히 이 기사를 받아썼다. 현원복의 기사는 이를테면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과학 특종이었던 셈이다. 그도 그럴것이 컴퓨터에서 한글을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은 가히 역사적 사건이라 할 만했다. 무엇보다도 우리식으로 사고하고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이 컴퓨터에 접목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현원복도 이 대목은 그냥 간과하고 있었다. 그는 이어지는 기사에서 컴퓨터에 의한 한글인쇄는 장차 인쇄혁명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문선(文選)과 식자(植字)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인쇄 외에 한글을 기계적으로 인쇄할 수 있는 것은 타자기 정도였으니 취재기자가 그 부분에만 관심을 가질 만도 했다.

『한글 프린트의 잇점은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 외에도 숫자와 글이 섞여 있어 납세서류나 학술논문 같은 것을 인쇄하는데 가장 적합하고 비용은 종이 값에 조금만 보태면 될 정도(1장 복사에 1원 꼴)로 싸다는 것이다.』

한글이 비로소 컴퓨터에 접목하게 된 것은 전산화와 정보화의 최대 걸림돌이 제거됐음을 뜻했다. 컴퓨터는 영어 알파벳을 기본환경으로 해서 태어난 기계장치였으므로 그 상태로는 한글문화권에서의 전산화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산화 영역이 그만큼 넓어졌고 그 진행속도 역시 더욱 빨라지게 된 것이다. 결국 모든 분야의 전산화는 결국 한글화가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성기수가 컴퓨터 한글화를 추진한 것은 KIST전산실 1호기인 「CDC3300」의 도입을 1년여 앞둔 68년말부터였다.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은 69년 초 미국 바텔(Battelle)기념연구소에서의 연수때였다. 66년 KIST의 설립과 초기운영을 맡았던 바텔기념연구소의 전산실 장비들은 당시 미국에서도 최고 수준이었다. 3개월의 연수기간에 성기수는 이곳에서 틈나는 대로 평소 생각해뒀던 컴퓨터 한글화 계획들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69년 5월 성기수는 바텔기념연구소 테스트결과를 토대로 「한글 문장의 전자인쇄화」라는 계획서를 만들었다. 69년 9월 「CDC 3300」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면 그로부터 1년 이내에, 늦어도 70년말까지 컴퓨터 한글처리 프로그램의 개발을 완료하겠다는 것이 성기수의 목표였다.

물론 이 목표는 요즘처럼 완벽하고 예쁜 모양의 글자들을 인쇄해 내는 수준과는 다소 거리가 먼 것이었다. 70년대 기술상황으로는 컴퓨터가 직접 한글서체를 처리하여 예쁜 모양의 글자를 뽑아낸다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애서 성기수의 컴퓨터 한글화 계획은 아주 간단한것 같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았다.그것은 순전히 한글의 문자적 특성 때문이었다. 한글은 영문 알파벳과 달리 입력할 때는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눠지지만 출력 과정에서 다시 이를 모아주는 과정이 필요한,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바로 이 과정의 처리가 성기수 계획의 핵심이었다. 성기수는 한글 자소를 모아주는 과정을 소프트웨어 명령으로 해결키로 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면 별도로 프린터 제어장치를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라인프린터 역시 영문체인을 한글체인으로 교체해주면 그만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컴퓨터에 직접 접근하기보다는 연결된 라인프린터의 한글화, 즉 한글라인프린터의 개발을 겨냥한 셈이었다. 일면 간단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컴퓨터 한글화에 대해 그 누구도 시도해본 적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한글의 언어적 특성에서부터 모든 새로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힘들고 고독한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CDC3300」을 공급했던 미국의 컨트롤데이터사(CDC)와 KIST전산실의 연구원이 태평양을 오가는 동안 2년이 흘렀다. 드디어 70년 11월 말, 컴퓨터에 연결된 라인프린터에서 『본 한글자판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개발한 것으로서 라인프린터의 영문CHAIN을 한글CHAIN으로…』로 시작되는 테스트 문구들이 찍혀져 나왔다. 벅찬 감격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컴퓨터에서 처리한 문서들을 곧장 프린터를 통해 뽑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까지도 컴퓨터 도입기관에서는 한글로 된 보고서가 필요할 경우 영문상태로 출력한 문서를 한글로 번역한 다음 이를 일반 인쇄소에서 재편집하는 이중작업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화국의 과금 고지서나 수십만명에 이르는 대학예비고사 채점처리 등 처음부터 한글인쇄가 필요한 대규모 데이터 처리 업무 전산화는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KIST전산실이 개발했던 한글라인프린터는 자음 14자소 1벌과 모음 13자소 1벌로 구성된 2벌식 자판을 지원했다. 받침이 있는 글자와 없는 글자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2벌식 글자체는 글자가 네모꼴에 가까운 5벌식이나 4벌식 글자체에 비해 다소 거친 것이 단점이었다. 이는 컴퓨터가 한글을 인식해서 알맞은 모양으로 출력해 주는 서체처리과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기수는 컴퓨터의 특성상 2벌식 자판처리방식이 값비싼 메모리의 소비를 줄여주는 등 여러모로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글자체가 거친것은 나중에 기술상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한편 2벌식 자판의 채택 과정에서 성기수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몇 가지 에피소드를 겪었다. 그 가운데 실용 한글타자기의 원조인 공병우(公炳禹)와의 만남은 젊은 전산실장 성기수를 잠시나마 들뜨게 했던 사건이었다.

당시 공병우는 50년대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공병우타자기공업사를 통해 직접 고안한 3벌식, 5벌식, 한영겸용자판 등 3종류의 타자기를 상품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한글타자기의 개발과 보급에 자신의 일생을 투자하다시피했던 공병우는 이 가운데 특히 3벌식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자음 14자소 1벌, 모음 16자소 1벌, 받침 22자소 1벌 등으로 구성된 3벌식 공병우타자기는 조작이 간편하고 시프트(Shift)키가 필요 없는 평단타자(平段打字)가 가능해서 당시 시중에서 엄청난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정부는 69년 7월 사실상의 표준이던 공병우의 3벌식 자판을 무시하고 2벌식과 4벌식 두 종류를 한글 표준자판으로 내세운 과기처 안을 국무총리령으로 제정 공포해버렸다. 하지만 전자식 텔레타이프용으로서 2벌식은 몰라도 일반 타자기용으로서 4벌식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성기수가 판단하기에도 이런 결정은 4벌식 타자기를 공급하는 업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사재를 쏟아부으면서까지 3벌식을 국가 표준으로 밀어붙이려던 공병우에겐 크나큰 낭패였다.

과기처를 사이에 두고 공병우 측과 4벌식 및 2벌식 자판을 채택한 타자기 공급업자들과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됐다. 그런 와중에서 KIST전산실이 한글의 컴퓨터 처리과정에 2벌식을 채택키로 했다는 소식은 공병우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2벌식 채택 이유는 정부 표준과 무관한 것이었는 데도 성기수의 결정은 결과적으로 반(反)공병우파의 손을 들어준 셈이 돼버렸다.

성기수는 공병우에게 정부의 자판 표준안은 컴퓨터와는 무관하며 컴퓨터용 자판은 차제에 다시 제정돼야 한다고 누차 설명했지만 공병우는 그것을 이해하려 들지를 않았다. 한번은 성기수는 저녁식사를 초대받아 공병우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60대 중반의 공병우는 이때 공병우타자기공업사 이외에 공병우타자기연구소와 본직인 공안과(公眼科)를 경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무엇하나 부러울 게 없었던 당대의 부자가 바로 공병우였다.

공병우가 이날 미제 고급 지프를 직접 몰고 홍릉 KIST로 찾아온 것부터 30대 중반의 성기수를 혼란스럽게 했다. 종로에 있는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성기수는 그 호화로움에 또 한번 놀랐다. 집에서 고용하는 전용 요리사가 꿩 혓바닥 요리라는 것을 큰 접시 가득 내놓았다. 공병우는 요리 재료로 사용된 꿩들을 모두 자신이 직접 사냥한 것이라고 자랑했다. 원래 고기를 싫어했던 성기수가 꿩요리를 먹는둥 마는둥 하고 있는 데 공병우가 본론을 꺼냈다.

『3벌식 타자기는 내 평생의 숙원사업이요. 나는 컴퓨터를 잘 모르오마는 성 박사가 3벌식 자판을 지지해 준다면 요구하는 어떤 연구비라도 댈 용의가 있소.』

성기수의 귀가 번쩍 트였다. 초창기 KIST전산실은 확보된 예산은 한정돼 있고, 하고자 했던 일은 많았던 그런 조직이었다. 공병우가 후원자가 된다면 「CDC 3300」의 용량 확장이나 컴퓨터 2호기 도입문제는 간단하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공병우의 집을 나서면서 성기수는 당시로서는 매우 희귀했고 고가였던 영한겸용타자기 한 대를 선물로 받았다. 며칠 뒤 성기수는 평소 타자기를 갖고 싶어하던 한 후배에게 공병우의 선물을 미련 없이 주어버렸다. 공병우의 제안은 그것으로 답한 셈이었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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