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브> 장리곡과 외자유치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 수백 년 동안 춘궁기에는 장리(長利)가 성행했다. 주로 지주는 봄에 곡식을 꿔주고 추수가 끝난 가을에 꿔준 곡식의 절반을 이곡(利穀)으로 챙겼다. 반년 만에 이곡으로만 50%를 받아들이는 것이니 요즘의 이율로 보면 연 1백%에 가까운 고리다. 그런 데도 보릿고개에 끼니가 궁한 사람은 장릿곡(長利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심화돼 나라에서 수시로 장리를 금하기도 하고 또 장생고 같은 것을 두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 그 폐해를 막지는 못했다.

전자업체들이 최근 외국 업체와 외자유치 협상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LG반도체와 현대전자가 각각 미국 반도체업체인 인텔로부터 10억 달러 이상을 유치하려 하고 있으며 삼성전자도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이나 스웨덴 일렉트로룩스 등과 백색가전제품 분야에서 합작을 모색하고 있다. LG텔레콤도 캐나다의 한 통신업체와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정부도 외환부족 타개를 위해 기업체에 각종 유인책을 쓰며 외자 유치를 독려하고 있고 기업체도 운영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터여서 외자 유치가 절실하고 시급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데도 외자유치는 기대만큼 빨리 성사되는 것 같진 않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의 외자 유치가 과거 장리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지주가 외국업체로, 장릿곡이 달러로 바뀌었을 뿐이다. 외국업체들은 더욱 많은 이곡을 챙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곡식 창고의 빗장을 풀려 하고 있으며 달리 방법이 없는 우리는 그들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것도 바를 바 없다. LG반도체와 인텔의 외자유치 협상에서 LG가 서두르고 있는 데도 인텔이 느긋함을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정부나 기업이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고리의 장릿곡이라도 꿔오는 데 급급하다면 우리가 외환위기에서 헤어나는 기간은 그만큼 길어질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장릿곡을 많이 꿔오는 것 못지 않게 얼마나 좋은 조건으로 그것을 성사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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