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포럼] 불법복제 누구의 책임인가

최경수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 연구실장

우리나라 소프트웨어의 대표주자인 워드프로세서 「한글」이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는데 최근 한글 사태는 진정되고 있다. 한때 한글 사용자들은 각종 매체를 이용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가 하면 정부에서도 큰 관심을 쏟았다. 급기야 전국적인 모금운동이 전개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러한 일들은 마치 일제시대의 물산장려운동이나 얼마 전의 금모으기운동을 연상하게 했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면서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했듯이 한편으로는 걱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책은 무엇일까 다각도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이번 사태는 한 기업의 흥망성쇠나 한 소프트웨어의 부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글의 몰락이 불법복제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너 때문이야」 하듯, 정부에서도 시장에서도 불법복제를 뿌리뽑자는 소리가 거세게 몰아쳤다. 불법복제물이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마당에 제대로 된 영업전략을 세울 수 있겠는가. 어느 기업이든 불법복제물이 판치는 상황에서 온전하게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는 항변은 분명 옳은 지적이다. 불법복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이것은 당위다. 그러나 불법복제는 소프트웨어 시장에서는 가혹한 현실이다. 이를 이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소프트웨어의 불법복제는 새로운 것도 아니고 특별한 뉴스도 아니다. 그럼에도 신문지상에는 불법복제가 관심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어느 나라는 몇 %의 불법복제율이니 하는 통계를 들이대면서 이 때문에 얼마의 손실을 보았다는 등등의 기사가 실린다. 이 점을 특히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뉴스는 모두 외국 유수의 소프트웨어협회(BSA나 SPA 등)가 정보원이다. 소프트웨어뿐 아니다. 비디오나 오디오관련 협회에서도 한 달이 멀다 하고 불법복제 통계를 우리 앞에 보여준다. 우리 기업은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보도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외국 권리자 측의 노력을 볼 때, 한글이 무너지면서 이를 불법복제 탓으로 돌리는 「변명」이 왠지 궁색하고 공허하게 들린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연유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책은 되돌려 주지 않아도 되는 것, 정보는 두루 공유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하다. 책은 소유물로서, 정보는 자산으로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왔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은 과시의 대상은 돼도 소유물로 인정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정보의 자산가치를 인정하지 않다 보니 한때 외국 유학생들이 현지에서 복사한 문헌들을 국내에 가지고 들어와 애지중지하며 하나씩 풀어놓는 세태도 있었다. 이런 점들이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을 업신여기는 원인 중 하나는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지적재산권의 본질 내지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소유권의 대상인 PC나 자동차와 같은 동산, 건물이나 토지와 같은 부동산은 한 사람이 차지하면 다른 사람이 이용하지 못한다. 반면 지적재산권의 대상인 특허, 상표, 저작물 등은 누구나 얼마든지 반복이용이 가능하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물건의 소유권과 지적재산권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성격이 있다.

첫째, 물건의 소유자나 지적재산권자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이를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권리자의 동의나 허락이 대상물 이용의 전제라는 점이다. 둘째, 이러한 재산권은 권리주체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노력이 없이는 보호가 잘 안된다는 점이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하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다. 이것은 사유재산권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명언이다.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발생한다면 소유자가 적극 나서 자기 것임을 주장하고 갖은 법적 수단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검찰에 고소하거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적재산권이 여러 경로로 침해가 예견된다면 이를 막기 위한 갖가지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침해되고 있는 경우 그 원인과 대책에 대해 곰곰이 따져보고 필요하다면 국가의 공권력에 의탁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큰 기업은 자체 내의 태스크포스를 두고 이 팀이 활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언론홍보와 일반 소비자의 의식고취도 그 중 하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특정 기업이 자신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한다는 혐의를 잡으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대책반을 만들어 몇 개월간 집요하게 증거를 수집하고 이를 근거로 법적 대응을 한다고 한다. 그저 불법물이 판을 친다고 「말로만」 소리를 높인 것 외에는 과연 우리 기업 중 어느 기업이 이러한 「낭비적인 일」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지적재산권은 본질적으로 사유재산에 다름 아니다. 앞에서 열거한 권리자 측의 권리보호를 위한 각종 홍보대책이나 법적 대응노력도 실은 이러한 적극적인 재산권 보호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국가기관을 상대로 한 소송도 못할 것이 없다 하겠다. 불법복제물이 공공기관에 설치돼 있다면 이는 엄연히 사유재산권 침해다.

사유재산권 존중의 원리는 계약자유의 원칙과 더불어 근대 시민국가의 2대 주춧돌이었다. 사유재산권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이유가 없었다. 오늘날이라고 해 시민국가의 원리가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대가 국가기관이든 무엇이든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이유로 회피한다는 것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저 무단복제 앞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아서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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