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明基 한국번역협회 회장
「지구촌」 또는 「세계화」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전부터 말이나 글에 의해서든 국적이 다른 사람들끼리의 의사소통은 중요했다. 통신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의사소통이 거의 실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정보통신의 시대에 번역의 정확성은 그 신속성만큼이나 민감한 사안이다. 사격장의 사대에서 0.1도 오차가 표적에서는 거리에 따라 몇만㎞를 벗어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기술번역 쪽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제품생산이 설계에서 부품 제작, 조립 등을 거쳐 최종 검수가 끝난 후 납품에 이르듯 번역 역시 똑같은 다단계 공정을 거쳐야 품질을 보증할 수 있다. 번역도 분야별로 전문화가 이루어져야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싫든 좋든 기술 분야 쪽에서는 아직도 외국기술을 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우리의 실정이다. 요컨대 번역은 지식 정보산업의 하부구조, 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문화의 기반을 구축한다. 그러나 국내 실정을 볼 때 기술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미미하다. 이는 번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중에서 가시적인 것에 기우는 경향 때문으로 보인다.
상품을 구성하는 요소를 구태여 제품과 서비스로 대별한다면 번역은 서비스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데 마케팅의 전 과정을 살펴볼 때 제품의 설계에서 사용 설명서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번역이 관여하지 않는 영역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시 말해 번역은 보이지 않는, 때로는 가장 잘 보이는 상품의 구성요소인 셈이다.
국내에서 기술번역, 특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로컬라이제이션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것은 IBM이 자사 제품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20여년 전이다. 그간 여러 기술번역 회사들이 제각기 고군분투하면서 국내 산업발전에 일익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한국의 기술수준에 비해 국내 기술번역 업계는 상대적으로 낙후돼 있는 게 현실이다. 번역을 포함한 지식산업이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원인은 복합적이다. 번역을 발주하는 측이나 수주하는 측 모두가 품질보다 가격을 우선순위에 둔 업계의 관행이 발전의 걸림돌이 돼 왔다.
이제 우리도 가격 경쟁력만으로 시장을 개척하던 방식을 탈피할 때가 됐다. 번역은 상품의 마지막 자리에 선택요소로 자리하지 않고 제품설계의 앞자리부터 끼어들어 품질의 방향을 결정하고 상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보이지 않는 손」이 돼야 한다. 이런 까닭에 발주사나 수주사가 모두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역설적이지만 가격보다 품질을 중시할 때 결과적으로 오히려 좋은 가격을 받아낼 수 있다.
21세기를 앞두고 서구의 국가들이 가장 큰 비중을 두고 투자하는 부문이 지식산업이다. 컴퓨터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정부가 민간단체의 컴퓨터 마인드 확산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한 것처럼 번역문화의 정착을 위해서도 이제 정부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정부 및 정부투자기관의 번역용역 예산이 현실화돼야 한다. 왜냐하면 원하든 원치 않든 정부 고시단가가 번역시장의 가격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원의 대가로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 모두에게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해외 투자자들은 재무구조가 취약한 기업들의 인수합병(M&A)에 나서고 있다. 번역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을 수동적으로 감내하기보다는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체질을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번역도 통계적 기법을 도입, 품질을 향상시키고 분야별로 전문화해 경쟁력을 제고해야 하며 번역공정에 고객을 참여케 해 고객만족도를 높여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이 국가적 이익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번역업계의 품질개선 노력만으로는 힘들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기업들은 번역관련 예산에 인색해서는 안된다. 정부는 번역업계에 대한 직간접 지원을 확대하고, 국민도 번역을 포함한 지식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할 때 이러한 지식기반을 바탕으로 우리는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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