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농부 한 사람이 느닷없이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나는 미국 플로리다대학 화공과 교수로 재직중인 후배와 10여년 만에 만나 점심을 먹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 농부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아내와 함께 1천2백평 규모의 비닐하우스에서 장미를 키우고 있는데 작년 IMF 이후로는 경유 값이 너무 올라 장미를 팔아봐야 장미 재배를 위한 난방용 경유 값을 대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유대신 값싸고 화력 좋은 폐타이어를 비닐하우스의 난방원료로 쓸 수 있도록 배기가스 정화장치를 개발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자신과 아내는 그저 열심히 살았는데 최근들어서는 일할수록 오히려 손해가 난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동절기가 오기 전에 시급히 개발되지 않으면 자신들을 포함해 60만 가구에 이르는 비닐하우스 농가가 길거리에 나앉게 될 수도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내가 한 번 해볼게요』하는 후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 친구가 괜히 객기를 부리나 싶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연필로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고 저녁 무렵, 반도체기판용 자동납땜기를 제작하는 중소기업 사장에게 정화장치 제작을 부탁했다.
그후 나는 그와 함께 세번 더 농장에 갔다. 원리는 간단했으나 예상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장치를 세번이나 뜯어고치고 고양의 농장에서 인천에 있는 공작소까지 높이 4m의 정화장치를 옮긴 것도 두번이나 됐지만 한달 만에 배기가스 내에 아황산가스와 미세한 탄소가루를 적절히 제거할 수 있게 됐다.
배기가스 정화장치를 비닐하우스에 설치하던 날 중소기업 사장과 농부와 점심을 같이 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해도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좋아하는 농부의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얼마 전 한글과컴퓨터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넘어갔다. 한국의 워드프로세서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1천만~2천만달러의 자금을 투자하겠다며 내건 조건은 한컴이 『앞으로 기술개발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 단 한가지였다. 산학연협동 최우수기업, 벤처기업대상, 그리고 뉴미디어 기업대상 등으로 우리나라 벤처기업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지던 한컴의 개발제품인 「한글」이 관공서, 학교 할 것 없이 정부에서 그 사용을 의무화함으로써 국내시장의 80.5%를 장악하게 되자 95년 이찬진 사장은 기술개발보다는 소비자의 요구를 외면하면서까지 정치판에 뛰어들어 MS워드와 경쟁에서 뒤처지게 된 것이다.
한컴의 몰락을 두고 우리나라의 자존심이 무너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잖으나 오늘의 한컴사태는 특혜를 부여함으로써 이 땅에 벤처를 육성하는 것은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에 걸맞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최근 불법복제금지운동이라든가 구제기금 모금 등 한글을 살리자는 운동이 다각도로 전개되고 있다. 원래 벤처기업이란 높은 위험부담의 대가로 성공만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는 일종의 도박 같은 것으로, 남보다 앞선 기술이라는 것에 철저히 의존하는 기업이다. 한글을 살리려면 MS사의 기술을 능가하는 제2의 한글을 만드는 길밖에 없다. 국민운동이나 정부의 특혜는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에 벤처기업을 나약하게 만들 뿐이다.
정부의 지원이 없었다면 한컴이 오늘날같이 성장할 수 없었겠지만 기술개발 포기에 의해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찬진 사장은 최대의 이윤을 얻기 위해 한컴을 사업상의 적인 MS사에 팔아넘긴 것으로 이 또한 나무랄 수 없는 벤처사업가의 정신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산업구조조정이라든가 고용안정이라는 국가적 절대절명의 과제를 벤처 육성에 의존하기보다는 기술의 낙후로 인해 쓰러져 가는 중소기업의 기술개발지원을 통해 이루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주승기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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