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한글살리기" 운동에 부쳐

한글과컴퓨터사가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투자를 조건으로한글 개발을 중단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 15일 이후 들끓던 여론의 향배가 점차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한국벤처기업협회가 중심이 된 한글지키기 운동본부에 당초 가상공간에서 한글살리기 서명운동으로 여론을 선도했던 네티즌들까지 두루 동참하면서 체계를 잡아가자 정부 유관부처들도 저마다의 입장표명에 나서고 여당인 국민회의도 대책마련에 나섰다.

그러나한글을 살리자는 국민운동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찮다. 우선 정부 부처 가운데서도 정보통신부는 일단 「시장논리로 해결해야 한다」는 불간섭 입장을 공식 표명했으나 외자유치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SW유통협의회 신근영 회장은 「한글지키기운동은 냉정을 잃은 행동」이라는 입장을 밝힌 서한을 각 언론사에 보냈다. 신 회장은 이 서한에서 이미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사내표준으로 MS워드를 쓰고 있으며 전세계의 표준화된 워드프로세서를 쓰는 것이 궁극적으로 국가경쟁력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글살리기운동 반대논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신 회장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MS와 경쟁할 수 있는 SW기업은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 SW산업계의 리더들은 모두 MS가 주력하지 않는 SW분야에서 독보적 기술력을 갖고 있으므로 MS가 손댄 분야에서 경쟁하려는 생각은 불합리하다는 의견이다.

이같은 반론은 최근 일본의 워드프로세서마저 MS워드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MS워드에 대항하는 독자적 워드프로세서를 가진 나라라는 현실을 감안할 때 적어도 효율성 측면에서는 타당성이 있다.

이쯤된 상황에서 연전 국내 기업의 프랑스 톰슨사 인수 시도가 좌절된 기억도 한번쯤 되살려볼 필요가 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해외자금을 끌어들이려던 프랑스 정부의 계획은 들끓는 반대여론에 부딪쳐 무산됐다. 우리로서는 분명 화가 나는 상황이었지만 프랑스 노동자들은 그들의 뜻을 끝내 관철시켰다. 프랑스는 그후 외국자본에 배타적인 나라로 낙인찍혔을까.

우리가 종종 어느 한쪽만 보고 서로 고집을 부리다 낭패를 겪은 역사적 경험도 되살려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개국론과 쇄국론이 부딪치며 세(勢)싸움을 벌이다 결국 국권 상실이라는 공동의 패배를 경험한 지 1백년이 지났지만 이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쟁점으로 되살아나곤 한다. 문제는 현실론이냐 이상론이냐를 취사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결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느냐 하는 데 있다. 남의 나라가 어떻게 해왔는지를 참고하는 것은 좋지만 그들과 우리가 어떤 공통점과 상이점이 있는지를 먼저 우리의 시각에서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의 워드프로세서 시장이 가장 최후까지 버티고 있는 데는 우리의 독특한 언어체계도 한몫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나라가 진작에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MS에 내줬음에도 불구하고 버티다 올해 들어 손을 들어버린 일본도 세계적으로 드물게 우리와 같은 어순을 가진 나라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화관광부가 한글학회, 한글바른말연구회 등 한글관련 단체들과 더불어한글살리기에 지지입장을 밝히는 이유도 우리의 자존심 손상과 함께한글의 폐기가 우리의 독자적 언어체계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소박한 애국심이 자칫 해외 기업들에 배타적 태도로 비칠 것을 우려하는 시선이나 좁은 국내시장만을 겨냥한 워드프로세서 개발이 낭비일 수도 있다는 현실론 모두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외자유치를 위한 개방적 분위기 조성과는 별개로 단지 폐기시키기 위해 소스코드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출자하는 MS의 행위는 분명 불공정 거래에 속한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불공정 행위 방지를 위한 조치는 주권국가 정부가 취할 당연한 행동이다. 개별기업간 계약은 존중돼야 하지만 시장논리를 중시하는 것이 곧 주권을 포기하는 일은 아니라는 점 또한 명심할 일이다. 아울러 외자유치가 급하지만 지혜로운 농부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코 종자까지 먹어치우지 않는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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