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21)

제5부 KIST전산실의 발족-"3인방" 영입 (2)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자계산실이 발족된 것은 문헌상으로 67년 9월 14일이었다. 하지만 전산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된 것은 이듬해 1월부터였다. 이에 앞서 성기수는 67년 12월 초 초대 KIST 소장 최형섭(崔亨燮)으로부터 전산실장 임명장을 받고 서울 종로2가의 YMCA빌딩 5층에 마련된 임시 사무실에서 혼자 전산실 출범작업을 서두르고 있었다. 성기수의 이때 나이 서른네살이었다.

성기수가 초대 KIST 전산실장으로 받은 대우는 파격적이었다. 책임연구원이라는 직급에 월급여가 10만원이나 됐다. 당시 동급 일반 대학교수의 월급여가 3만원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한 일간신문이 유치 과학자들의 급여가 일반 대학교수 평균의 2.6배 수준이라고 소개한 기사가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실제로 KIST는 연륜을 보면 갓 설립된 병아리급 연구소에 불과했지만 설립 배경이나 앞으로의 전망 등 모든 면에서 당시 과학계 인사나 이공계 학생에게는 최고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유치 과학자에 대한 대우는 66년 KIST 설립 당시 한국과 미국 양국 사이에 체결된 한미 협정서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이 문건에는 「한국에서 가장 유능한 과학기술자들로 충원될 것이며 급여수준과 기타 수당은 외국에 거주하는 인재를 포함해 우수한 한국 과학기술자들을 유치할 수 있는 정도로 책정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12월 한달 동안 성기수가 심혈을 기울였던 일 가운데 하나가 전산실 직원을 채용하는 일이었다. 우선 자신을 도와 전산실 발족작업을 진행시켜 나갈 서너명의 연구원급 직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기수는 최형섭으로부터 전산실장 임명장을 받은 날부터 이미 자신을 도와 전산실 발족작업을 맡아줄 세 사람의 연구원을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 이 세사람이 바로 안문석(安文錫), 이명재(李明宰), 이승윤(李承允) 등 KIST 전산실 발족 3인방이었다.

이 세사람 모두 성기수가 65년 한국경제개발협회(KDA)에서 조사역으로 일할 당시 만났던 이들이었다. 세사람 가운데 이명재(현 부산대 경제학과 교수)와 이승윤(작고, 전 아시아개발은행 이사)은 서울대 경영대학원을 졸업(석사과정)하고 경영대학원장 변형윤(邊衡尹, 현 서울대 명예교수)의 추천으로 KDA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중이었다. 이명재의 경우는 학부때 물리학과를 졸업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석사과정)한 안문석(현 고려대 정책대학원장) 역시 스승이자 행정대학원장이던 이한빈(李漢彬, 현 동원증권 고문)의 추천으로 KDA에서 파트타임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성기수를 만났다.

KDA시절 이명재와 이승윤은 경제팀 소속 연구원으로서 경제개발 15개년 중장기 계획을 계량(計量)하던 조사역 성기수를 직접 돕는 일을 했다. 반면 행정학을 전공했던 안문석은 경제팀 바로 옆방에서 종합소득세 제도 도입을 연구했던 조세팀 소속으로 성기수와 업무 상으로 조우한 일은 없었다.

KDA에서 성기수가 맡은 작업은 앞서 설명했던 대로 11원 연립1차 방정식과 같은 고차원의 수학적 계산을 동반하는 일이 많았는데 탁상용 계산기(Calculator)만을 두드리는 2명의 여직원이 항상 그의 옆을 지켰을 정도였다. 이 때 사용된 계산기는 당시로는 세계적으로 최고 성능을 자랑하던 「프라이든(Friden)」이라는 제품이었는데도 역행렬 등과 같은 고급 수식의 계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성기수는 이런 계산식을 직접 포트란 언어로 프로그래밍해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던 일본의 한 민간 소프트웨어 용역회사에 의뢰해 해결하곤 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성기수는 국제우편을 이용해 프로그램 자료를 일본에 보냈고 역시 국제우편을 통해 결과물을 받아보았다. 용역비용은 모두 무료였는데 일본회사측이 『한국정부가 경제개발을 위해 컴퓨터를 이용하는 첫 사례니 만큼 축하하는 뜻에서 돈을 받지 않겠다』라고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아직 단 한대의 컴퓨터도 도입되지 않았던 시절의 우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상황 속에서 성기수는 틈나는 대로 이명재와 이승윤에게 한국에도 멀지않아 반드시 컴퓨터가 도입되고 정보시대가 도래할 것을 강조했고 나아가 이들에게 미리 포트란언어를 배워두도록 충고했다. 셋의 대화에 옆방의 이명재, 이승윤 등과 동문 사이였던 안문석이 자연스럽게 가세하게 돼 KIST 3인방의 팀워크는 이미 이때부터 이뤄지고 있었던 셈이었다.

성기수가 이 세사람을 선호했던 것은 함께 일했던 경험을 통해 서로의 성향 등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명석한 두뇌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 사람은 이공계통인 자신의 전공과 달리 사회과학도로서 컴퓨터나 정보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이런 조건들은 전산실의 초기 조직정비와 운영과정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세 사람도 성기수와 함께 KIST 전산실에서 일하는 것을 크게 원하는 바였다. 적어도 60년대 말까지 한국사회에서 석사학위는 박사과정을 밟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가치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고학력을 기피하던 사회상황이었던 만큼 취직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안문석은 성기수를 따르게 된 이유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KDA 시절 어느날 복도에서 쉬고 있는데 몇번 안면이 있던 공군장교 복장의 성기수가 지나갔다. 그를 보고 옆에 있던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저 공군대위와 친해두면 손해보지는 않을 것이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나중에 틀림없이 무슨 일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더군.』

성기수는 67년 12월 말 어느날 KIST에서 직속상관인 심문택(沈汶澤) 부소장에게 전산실장을 보조할 기술수로 안문석, 이명재, 이승윤 등 세 사람을 추천하고 연구원급으로 정식 채용할 것을 요청했다.

당시 KIST의 직제는 소장 밑에 행정과 사업관리를 담당하는 행정담당 부소장과 KIST 본연의 업무인 연구개발업무를 담당하는 연구담당 부소장 등 2개의 축으로 돼 있었다. 전자계산실은 기술정보실, 분석실, 공작실, 연구개발실, 연구지원과, 도서실 등 다른 6개의 실, 과와 함께 연구담당 부소장 밑에 배치돼 있었다(설립부터 68년 4월까지). 이 때의 연구담당 부소장이 바로 서강대 화학과 교수 재직 중에 유치된 심문택이었다. 그는 최형섭이 과기처 장관으로 영전된 71년 6월부터 8개월여 동안 제2대 KIST 소장에 오르기도 했다.

심문택은 성기수가 요청한 안문석, 이명재, 이승윤 등의 채용에 대해 난색을 표명했다.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공채가 아닌 특채 형식의 입소는 곤란하다는 요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구소 주변에서는 세 사람의 특채과정에 대해 말이 많았던 터였다. 성기수는 심문택을 찾아가 한국사회에서 안문석 등처럼 경제와 행정분야를 전공한 고학력자로서 컴퓨터를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을 찾기란 흔치 않다는 사실과 이들이 명석한 두뇌는 물론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점을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이 추천한 인물들을 채용해주지 않을 경우 전산실장으로서 임무수행에 막대한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식의 담판을 시도했다.

성기수가 시도했던 담판은 결국 심문택의 마음을 흔들었다. 안문석, 이명재, 이명재 세 사람은 68년 1월 초 연구수(硏究手, 지금의 연구원)로 정식 발령이 났다. 이렇게 해서 KIST 전산실은 전산실장 성기수와 세 사람의 연구수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세 사람은 경제발전과 함께 KIST 전산실의 역할이 급팽창하는 70년대 성기수를 도와 오늘날의 시스템공학연구소(SERI)로 발전하기까지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전산실이 정식 문을 연 68년 초 성기수는 서울 홍제동 집에서 종로2가 사무실까지 미제 중고 픽업트럭을 몰고 출퇴근했다. 자동차가 흔하지 않는 시절이었던 데다 복장도 공군 장교복이어서 성기수는 주위에서 적지 않게 화제의 인물이 되곤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성기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생소하고 신기하기만 했던 「컴퓨터」를 다루는 과학자라는 모습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한국의 최고 두뇌만 모인 KIST에 컴퓨터를 다루게 될 전자계산실이 설치되고 그 곳을 책임지게 될 전산실장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했다. 전산실 발족 초부터 성기수는 여러곳에 불려다니며 컴퓨터에 대한 이해와 정보시대의 도래에 대한 강연을 도맡아 했다.

한편 66년 10월부터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39번지 일대(홍릉단지)에서 시작됐던 본관, 연구동, 연구원아파트, 기숙사, 소장공관 등 신축공사가 일부 완공을 보면서 68년 7월 28일 KIST는 그 동안 YMCA빌딩에 임시 마련했던 사무실을 모두 이전, 홍릉시대를 개막했다. 이 때 성기수의 전산실도 함께 따라 홍릉단지로 들어왔다.

<서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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